♧ 시인의 말
가을이 오기까지는,
폭염의 날들을 견딘 지난여름 있었다.
사방이 멈춰 있는 듯 고요 속 저 아랫마을,
한낮의 경적에 휩싸였다.
멎은 듯, 이내 오름 정상 노란 깃발 휘날려
강렬한 불볕 아래 바람은 저를 드러내었다.
땀 흘린 산행 한 줄기 바람이 간절하던 때
시도 이와 같은 일이다.
그렇게 받아들여, 절로 스며나는 일이다.
♧ 참빗살나무
참빗처럼 나뭇잎을 파고드는 햇살에
한라 능선 차오르는 치렁치렁 머릿결
언젠가 마주친 소녀 빛나던 이유 알겠다
어머니 나를 눕혀 서캐를 고르시던
그 손길 설핏 든 잠, 홀로 깨어 서러운 날
땀 냄새 절은 머리칼 참빗살나무 근처다
몇 번을 멈칫대다 끝내 찾지 않은 집
수직의 돌계단 산정 아래 이르러
푸르름 순명으로 받드나 붉게 익는 열매들
♧ 단풍
놓치는 건 네가 아닌 내 안의 시월이다
붉게 쏟아지는 울음의 저 길 끝으로
붙잡지 못하는 마음 서늘히 번져간다
♧ 편백나무
-추사체로 읽다
천백도로 들어 선 바로 앞의 푸른 사람
시조의 품성처럼 허허로운 눈매여
튼실한 잎의 문체로 아이 여럿 품고 있다
♧ 남방큰돌고래
한수리 갯비린내 음파를 감지하듯
잔잔한 물결이 사막으로 인도하는
순식간 펼쳐진 장관 신기루 돌고래 떼
바다위로 솟구쳐
물파랑치며 사라진
헛손질 못 붙잡는 꿈결의 어머니
눈시울 붉어진 새벽
까마득 놓쳐버린 시
♧ 하논*
부름에 대답하듯 발걸음을 놓는다
아득한 새 지평의 또 다른 섬에 닿아
가만히 귀 기울이니 풀벌레 소리 가득하다
뉘엿한 가을 들녘 그림 속에 빨려들어
오만 년 전 물길이 간곡하게 이르는
세상의 근본을 열어, 한 끼 밥 뜸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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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논 : 분화구 안의 논, 습지와 샘이 있다.
♧ 바람의 날 ․ 4
-억새
우, 우, 우 이명의
울음을 삼킨 들녘
한 번 더 받들어야 할
돌투성이 자갈밭
닳아져 벼리던 날들
푸르게 살아,
살아있으랴
♧ 한라부추 꽃
누군가의 위로가
갈바람이 스며있어
천백고지 습지 데워 젖은 발을 감싸나
보랏빛 네 안의 영토
그리움을 쟁이다
♧ 차마고도
묵혀둔 차茶도 없이 올랐음을 알아채었나
맞닥뜨린 말 행렬 비키라는 듯 휘젓는 손
등줄기 저 가파름을 거뜬히 올려놓는다
그 어디서도 똑같은 사람의 자취는
말 잔등 위 여물의 숭고한 무게만큼
허공에 가벼이 실리는 한생이 한 시점일
어디까지 이르러야 다시 또 지평에 닿나
달라붙은 흙먼지 속 새어나는 말똥냄새
높은 길 서두는 걸음이 자꾸 나를 되돌린다
♧ 팥배나무
-시간 속을 부는 바람 전- 강요배
하늘과
땅의 경계
그 어디쯤 서 있었나
법정악
전망대
새파랗던 하늘 아래
불식간 쏟아내는 말
데인 듯이 뜨겁다
*김윤숙 시집『참빛살나무 근처』(도서출판 작가, 201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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