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윤숙 시집 '참빗살나무 근처'

김창집 2018. 11. 8. 17:23


시인의 말

 

가을이 오기까지는,

폭염의 날들을 견딘 지난여름 있었다.

 

사방이 멈춰 있는 듯 고요 속 저 아랫마을,

한낮의 경적에 휩싸였다.

 

멎은 듯, 이내 오름 정상 노란 깃발 휘날려

강렬한 불볕 아래 바람은 저를 드러내었다.

 

땀 흘린 산행 한 줄기 바람이 간절하던 때

시도 이와 같은 일이다.

그렇게 받아들여, 절로 스며나는 일이다.

     

 

참빗살나무

 

참빗처럼 나뭇잎을 파고드는 햇살에

한라 능선 차오르는 치렁치렁 머릿결

언젠가 마주친 소녀 빛나던 이유 알겠다

 

어머니 나를 눕혀 서캐를 고르시던

그 손길 설핏 든 잠, 홀로 깨어 서러운 날

땀 냄새 절은 머리칼 참빗살나무 근처다

 

몇 번을 멈칫대다 끝내 찾지 않은 집

수직의 돌계단 산정 아래 이르러

푸르름 순명으로 받드나 붉게 익는 열매들

   

 

 

단풍

 

놓치는 건 네가 아닌 내 안의 시월이다

 

붉게 쏟아지는 울음의 저 길 끝으로

 

붙잡지 못하는 마음 서늘히 번져간다

     

  

 

편백나무

   -추사체로 읽다

 

천백도로 들어 선 바로 앞의 푸른 사람

 

시조의 품성처럼 허허로운 눈매여

 

튼실한 잎의 문체로 아이 여럿 품고 있다

   

 

 

남방큰돌고래

 

한수리 갯비린내 음파를 감지하듯

잔잔한 물결이 사막으로 인도하는

 

순식간 펼쳐진 장관 신기루 돌고래 떼

 

바다위로 솟구쳐

물파랑치며 사라진

 

헛손질 못 붙잡는 꿈결의 어머니

 

눈시울 붉어진 새벽

까마득 놓쳐버린 시

   

 

 

하논*

 

부름에 대답하듯 발걸음을 놓는다

아득한 새 지평의 또 다른 섬에 닿아

가만히 귀 기울이니 풀벌레 소리 가득하다

 

뉘엿한 가을 들녘 그림 속에 빨려들어

오만 년 전 물길이 간곡하게 이르는

세상의 근본을 열어, 한 끼 밥 뜸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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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논 : 분화구 안의 논, 습지와 샘이 있다.

   

 

 

바람의 날 4

    -억새

 

, , 우 이명의

 

울음을 삼킨 들녘

 

한 번 더 받들어야 할

 

돌투성이 자갈밭

 

닳아져 벼리던 날들

 

푸르게 살아,

 

살아있으랴

   

 

 

한라부추 꽃

 

누군가의 위로가

 

갈바람이 스며있어

 

천백고지 습지 데워 젖은 발을 감싸나

 

보랏빛 네 안의 영토

 

그리움을 쟁이다

     

 

 

차마고도

 

묵혀둔 차도 없이 올랐음을 알아채었나

 

맞닥뜨린 말 행렬 비키라는 듯 휘젓는 손

 

등줄기 저 가파름을 거뜬히 올려놓는다

 

그 어디서도 똑같은 사람의 자취는

 

말 잔등 위 여물의 숭고한 무게만큼

 

허공에 가벼이 실리는 한생이 한 시점일

 

어디까지 이르러야 다시 또 지평에 닿나

 

달라붙은 흙먼지 속 새어나는 말똥냄새

 

높은 길 서두는 걸음이 자꾸 나를 되돌린다

   

 

 

팥배나무

   -시간 속을 부는 바람 전- 강요배

 

하늘과

 

땅의 경계

 

그 어디쯤 서 있었나

 

법정악

 

전망대

 

새파랗던 하늘 아래

 

불식간 쏟아내는 말

 

데인 듯이 뜨겁다

 

 

               *김윤숙 시집참빛살나무 근처(도서출판 작가,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