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장영춘 시집 '단애에 걸다'

김창집 2018. 11. 12. 00:13


시인의 말

 

무엇을 찾아 나섰는지

 

나도 모르겠다

 

 

가도 가도

 

아프도록

 

멀기만 하다



   

 

 

과물

 

애월과 금성 사이

밀물과 썰물 사이

백록담 숨어든 물 해안에 와 터지는

그만치 그 거리에는 곽지리 과물이 있다

 

윗물은 마시는 물,

아랫물은 멱 감는 물

숭숭 뚫린 담벼락 여탕을 훔쳐보던

깔깔깔 조무래기들 멱살 잡힌 낮달아

 

물허벅에 퐁퐁

원정물질 발동기 소리

울산일까 방어진일까 어머닌 떠났어도

내 고향 마르지 않는 순비기꽃 숨비소리


 

 

 

한반도 언덕*

 

누가 그랬을까 역사의 뒤안길에

말미오름 올라서면 푸르디푸른 보리밭

어쩌면 한반도 지도 저렇게 쏙 빼닮았네

 

아무렴, 봄이 오지, 오지 않고 배기리

TV 채널마다 낯설디 낯선 풍경

한반도 두 사나이가 어깨 나란히 하고 가는

 

남북이 오가는 게 눈 깜짝할 순간인 걸

아무렴, 꽃이 피지, 피지 않고 배기리

남녘 끝 섬 하나 품고 이미 봄이 만져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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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올레1코스 말미오름에 가면 한반도 모양의 밭이 있다.


   

 

 

고래콧구멍 동굴

 

우도에도 길이 있다 경안동굴 가는 길

한 달에 서너 번쯤 그것도 여덟 물쯤

헐거운 안전모 쓰고

겨우 찾아드는 길

 

문득 여기에 와 너를 한번 불러본다

바다도 잠시 잠깐 허천을 보는 사이

파도 끝 갯바위 아래 내 팔을 내가 놓쳐

 

너에게 이르는 길 이리도 캄캄할까

허공에 손 내밀다 뿌리치고 가는 바람

골절상 입은 바다가

고래처럼 울고 있다


   

 

 

장한철 산책로

 

한겨울 망망대해 폭우와 마주한

출렁이던 시간 닻줄마저 놓아둔 채

장한철 산책로에서

표류기를 띄운다

 

닿을 듯 닿지 못해 홀로 더 깊어진 섬

휘청이는 급물살에 아직 저리 흔들리고

순비기 야윈 등마저 덩그러니 누운 날

 

그 많던 발자국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해풍 맞은 수선 향기 아직 그대로인데

바람에 흔들리던 초가

수평선을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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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철 표류기 ; 조선후기 문신으로 1770년 대과에 응시하려고 제주를 떠났다가 비바람과 해적의 위협을 뚫고 살아 돌아온 25일간의 기록물.


   

   

단애에 걸다

 

이 겨울 누가 내게 마른 꽃을 건넨 걸까

거꾸로 걸어놓은 한 움큼 산수국이

 

기어코 애월 바다로

나를 끌고 나왔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한 무리 괭이갈매기

저마다 파도 끝에 사연들을 묻어놓고

 

늦은 귀갓길에 눈 몇 송이 남아서

모난 마음 한쪽 자꾸만 깎아내다

 

아슬히 단애斷崖에 걸린

인연마저 떠민다

   


 

항파두리

 

밤마다 별빛들이

다녀가는

샘이 있다

 

어느 장수 발자국이

섬으로

찍혀 있는

 

장수물 얼비친 성을

떠받든

눈빛이 있다

   


 

 

흙으로 쌓다

 

돌 많은 제주에서 돌로 성을 쌓지 않고

흙더미 한 삽 한 삽 항파두리 쌓은 뜻은

흙으로 돌아갈 결기

다진 것이 아니겠나

 

저 길 아지랑이, 파도 끝 아지랑이

수평선 수문 열 듯 몰려들던 창과 방패

유언도 남기지 못한, 바람결 안부 같은

 

어디 올 테면 와라.

무릎 꿇지 않으리

적인지 아군인지 내 성은 내가 지키리

민들레 망루에 올라 봉홧불을 올린다


   

 

 

이제는 노래하고 싶네

   -도안응이아*

 

이쯤이면 이쯤이면

곰삭은 노래가 되리

 

꽝아이 그 아이도 4.3둥이 내 친구도

봄 오는 저 들녘에다 초록 옷 입히고 싶네

  

눈멀고 귀먼 시간 기타 줄로 고르네

겨우 젖동냥으로 저렇듯 살아났지만

따이한 용서한다는 그 눈빛 어른거려

 

미안하다 꽝아이,

미안하다 도안응이아

 

악수 한 번 못 건네고 먼 길 돌아왔지만

길 위에 노래가 되어 떠 도는 노래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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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응이아 : 베트남 꽝아이 민간인 학살 때, 단 한 사람의 생존자



희망봉

 

다랑쉬오름보다 낮고

아끈다랑쉬보다는 높은

대서양과 인도양 사이 뱃길도 쉬어가는

펼쳐 든 세계지도에 바람의 길 있었네

 

고난 끝에 다다른 바다의 오아시스

68일 일정으로 내 발길도 예까지 와

한동안 바람꽃같이 흔들리고 흔들리네

 

한 겹의 파도 자락 숙명처럼 온 것일까

그 봄날 황사평으로 손 놓고 가버린 아이

내 안의 희망봉 찾아

다시여기 떠나야겠네


     

 

김녕, 성세기해변

 

바다만 바라봐도 그 소리가 들린다

 

김녕 성세기 해변 그 길을 돌아들어

 

창세기 첫 구절 같은 그 이름들 호명한다

 

수평선을 거두고 이제 그만 돌아오라

 

아직도채우지 못한 스마트폰 메시지

 

팽목항 먹먹한 가슴, 멈춰버린 울음 한 채



                            *장영춘 시집 '단애에 걸다' (황금알,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