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무엇을 찾아 나섰는지
나도 모르겠다
가도 가도
아프도록
멀기만 하다
♧ 과물
애월과 금성 사이
밀물과 썰물 사이
백록담 숨어든 물 해안에 와 터지는
그만치 그 거리에는 곽지리 과물이 있다
윗물은 마시는 물,
아랫물은 멱 감는 물
숭숭 뚫린 담벼락 여탕을 훔쳐보던
깔깔깔 조무래기들 멱살 잡힌 낮달아
물허벅에 퐁퐁
원정물질 발동기 소리
울산일까 방어진일까 어머닌 떠났어도
내 고향 마르지 않는 순비기꽃 숨비소리
♧ 한반도 언덕*
누가 그랬을까 역사의 뒤안길에
말미오름 올라서면 푸르디푸른 보리밭
어쩌면 한반도 지도 저렇게 쏙 빼닮았네
아무렴, 봄이 오지, 오지 않고 배기리
TV 채널마다 낯설디 낯선 풍경
한반도 두 사나이가 어깨 나란히 하고 가는
남북이 오가는 게 눈 깜짝할 순간인 걸
아무렴, 꽃이 피지, 피지 않고 배기리
남녘 끝 섬 하나 품고 이미 봄이 만져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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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올레1코스 말미오름에 가면 한반도 모양의 밭이 있다.
♧ 고래콧구멍 동굴
우도에도 길이 있다 경안동굴 가는 길
한 달에 서너 번쯤 그것도 여덟 물쯤
헐거운 안전모 쓰고
겨우 찾아드는 길
문득 여기에 와 너를 한번 불러본다
바다도 잠시 잠깐 허천을 보는 사이
파도 끝 갯바위 아래 내 팔을 내가 놓쳐
너에게 이르는 길 이리도 캄캄할까
허공에 손 내밀다 뿌리치고 가는 바람
골절상 입은 바다가
고래처럼 울고 있다
♧ 장한철 산책로
한겨울 망망대해 폭우와 마주한
출렁이던 시간 닻줄마저 놓아둔 채
장한철 산책로에서
표류기를 띄운다
닿을 듯 닿지 못해 홀로 더 깊어진 섬
휘청이는 급물살에 아직 저리 흔들리고
순비기 야윈 등마저 덩그러니 누운 날
그 많던 발자국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해풍 맞은 수선 향기 아직 그대로인데
바람에 흔들리던 초가
수평선을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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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철 표류기 ; 조선후기 문신으로 1770년 대과에 응시하려고 제주를 떠났다가 비바람과 해적의 위협을 뚫고 살아 돌아온 25일간의 기록물.
♧ 단애에 걸다
이 겨울 누가 내게 마른 꽃을 건넨 걸까
거꾸로 걸어놓은 한 움큼 산수국이
기어코 애월 바다로
나를 끌고 나왔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한 무리 괭이갈매기
저마다 파도 끝에 사연들을 묻어놓고
늦은 귀갓길에 눈 몇 송이 남아서
모난 마음 한쪽 자꾸만 깎아내다
아슬히 단애斷崖에 걸린
인연마저 떠민다
♧ 항파두리
밤마다 별빛들이
다녀가는
샘이 있다
어느 장수 발자국이
섬으로
찍혀 있는
장수물 얼비친 성을
떠받든
눈빛이 있다
♧ 흙으로 쌓다
돌 많은 제주에서 돌로 성을 쌓지 않고
흙더미 한 삽 한 삽 항파두리 쌓은 뜻은
흙으로 돌아갈 결기
다진 것이 아니겠나
저 길 아지랑이, 파도 끝 아지랑이
수평선 수문 열 듯 몰려들던 창과 방패
유언도 남기지 못한, 바람결 안부 같은
어디 올 테면 와라.
무릎 꿇지 않으리
적인지 아군인지 내 성은 내가 지키리
민들레 망루에 올라 봉홧불을 올린다
♧ 이제는 노래하고 싶네
-도안응이아*
이쯤이면 이쯤이면
곰삭은 노래가 되리
꽝아이 그 아이도 4.3둥이 내 친구도
봄 오는 저 들녘에다 초록 옷 입히고 싶네
눈멀고 귀먼 시간 기타 줄로 고르네
겨우 젖동냥으로 저렇듯 살아났지만
따이한 용서한다는 그 눈빛 어른거려
미안하다 꽝아이,
미안하다 도안응이아
악수 한 번 못 건네고 먼 길 돌아왔지만
길 위에 노래가 되어 떠 도는 노래가 되어
---
*도안응이아 : 베트남 꽝아이 민간인 학살 때, 단 한 사람의 생존자
♧ 희망봉
다랑쉬오름보다 낮고
아끈다랑쉬보다는 높은
대서양과 인도양 사이 뱃길도 쉬어가는
펼쳐 든 세계지도에 바람의 길 있었네
고난 끝에 다다른 바다의 오아시스
6박8일 일정으로 내 발길도 예까지 와
한동안 바람꽃같이 흔들리고 흔들리네
한 겹의 파도 자락 숙명처럼 온 것일까
그 봄날 황사평으로 손 놓고 가버린 아이
내 안의 희망봉 찾아
다시여기 떠나야겠네
♧ 김녕, 성세기해변
바다만 바라봐도 그 소리가 들린다
김녕 성세기 해변 그 길을 돌아들어
창세기 첫 구절 같은 그 이름들 호명한다
수평선을 거두고 이제 그만 돌아오라
아직도채우지 못한 스마트폰 메시지
팽목항 먹먹한 가슴, 멈춰버린 울음 한 채
*장영춘 시집 '단애에 걸다' (황금알, 201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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