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방영 시집 '그 아침 숲에 지나갔던 그 무엇'

김창집 2019. 1. 29. 22:54



 바람이 인다

 

바람이 인다

출발이다

 

다시 시작되는 여정

푸른 겨울 하늘

 

구름들이 움직인다

드넓은 하늘 길이다

   

 

 

굼부리*

 

가까이 올 생각은

하지도 말라

어떤 물체도 감당 못한다.

저 아래 심연

불의 소용돌이!

 

감히 열어서

보려고 말라

오랜 시간의 빗장

열리면 생명이 없다

 

그 문에 이르기도 전에

모두 녹아버릴 것을

 

너의 길은 다만 하늘 아래

오름이 품은 굼부리에 있으니

그 안에 담기는 하늘과 구름

철철이 나오는 풀꽃과 새들

그들을 따르면 길을 찾으리라

 

---

* 굼부리 : 화산 분화구를 제주에서는 굼부리라고 부른다. 오름이 솟아오를 때 폭발하며 남기는 낮은 지대가 굼부리며, 어떤 굼부리는 물을 담고 있기도 하고 또 바다 밑에 있는 굼부리도 있다.

 

 

 

흰눈

 

멀고도 추운 하늘 꽃밭에서

무수히 날아오는 작은 꽃씨들

바람을 타며 모두 춤을 춘다

 

희고 작은 꽃씨들의 여행

날개 파닥이며 서로 돌아보며

어디에 내릴까 찾고 있다

 

어디인가 날개 접고 내릴 데는

어디인가 잠시 꿈을 꿀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봄을 심을 작은 터는

   

 

 

파도

 

밀려오고

다시 뒤로 물러나며

늙지 않는 파도

무한의 시간을 깨뜨리고 또 깨는

수세기 동안 고동치는 심장의 박동

   

 

 

눈 내린 벌판

 

눈 내린 벌판

하얗게 덮어오는 정적

 

바람이 이따금 다가와

골짜기로 눈가루 날리고

 

산처럼 우뚝 서는 작별

아릿아릿 솟는 슬픔

 

절망은 나무를 앙상하게 하고

삶의 약속은 봄처럼 멀다

 

몸을 이끌고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 건너가는 이 벌판에서

 

닿을 곳이 어디 어느 방향인지

알 듯 하다가 다시 모르고

   

   

작별은

 

작별은

겨울 추운 날

어두운 하늘

뼈 속으로

불어오는 바람

 

모든 것이

빛을 잃고

쓸쓸해

돌아서면 암담함

표현 못할 답답함

   

 

 

잊어가기

 

조금씩 나를 잊자

 

새들마저 조용한

눈 오는 날

 

오가는 사람 없는

눈 덮인 마당처럼

 

목숨은 녹슬며 부서지는데

보이지 않는 세월 흔적 없는 만남

 

생각도 지치면 사라지고

비어가는 것이 별일 아니니

 

고요한 풍경 속에

이제부터 나를 버리자

   

 

 

그 아침 숲에 지나갔던 그 무엇

 

그것은 단지

바람이었을까,

일시에 숲을 흔들어

모든 나무들이 몸을 굽히고

모든 잎들이 뒷면을 보이며

은회색 꽃다발인 양

한꺼번에 절을 했을 때,


단숨에 그 절을 받으며

화르륵 숲을 밟고

지나서 갔던 그것은

오직 바람뿐이었을까,

 

바람을 타고 함께

어떤 기운이 지나서 갔기에

숲은 그를 알아차리고

나무를 온몸으로 나부끼며

빠르게 통과하는 그를 반겼기에


그 무엇이 지날 때

심해에 빛이 들 듯

거대한 숲은 스스로 쪼개져

일순간 길을 내었다가

다시 곧 닫았던 것이 아닐까

 

거기에 있던 모든 존재가

맛보았던 예기치 못한 감동,

잊을 수 없고 해독 불가한 아픔.

흔적 없는 그 무엇이 사라지며

남겨놓은 표현 못할 어떤 기억,

 

그것은 단지 바람 때문이었을까

 

 

 

담장 위로 솟은 애기동백꽃

 

찬바람에 내어 맡긴 채

흔들리는 붉은 애기동백

여린 꽃잎들

 

옆에 선 목련은

겨울 외투 속에 숨겨서

몰래 꽃눈들 키우는데

 

울타리 위로 떠올라

흰꽃 안과 금빛 꽃술까지

막힘없이 활짝 열어놓고

 

찬바람 눈바람

한겨울 바람에

춤추는 붉은 꽃들

 

부풀어 오르는 설렘 내뿜어

초록 잎들 사이로 노랗게 하얗게

날아오르는 그 향기

 

누가 막을 것인가

추위도 데우는 꽃불

지기 위해 타는 열정을

 

작은 눈 날아다니는

바람 속에서 붉은 꽃들

빛나는 꽃들

 

일 끝나 집으로 가는데

길에 서서 찬바람을 흔드는 꽃무리들

그 빛으로 가득 차 가슴이 벅차다!

 

 

     *강방영 시집그 아침 숲에 지나갔던 그 무엇(시문학 시인선 576,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