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성운 시조집 '버릴까' 2

김창집 2019. 1. 26. 13:36


동백꽃 봄날


동백나무 아래서 누가 부르댈까

겨우내 앓던 마음 이 봄날 울렁거려

동박새 부리만 대도

울컥 지고 마는

 

내 어릴 때 잔칫집엔 동백꽃이 환했지   

마그네슘 불빛 터져 발개지던 새색시 볼  

하객들 콩씨 뿌렸네   

그에 또 꽃잎 지던

    

 

청보리 밭

 

4, 청보리 밭

더러 흘린 장끼 울음

 

겨울을 잘 참았다

이삭들 곧게 패고

 

내 한때

뒤돌아보면

종다리 울음 몇 점

 

  

  

실거리꽃

 

연둣빛 5월에는 부르지 않아도 오가고

넘칠 듯 향기 담아 살랑거리는 꽃송이들

어린 날 노란 손수건 내목에도 매고 싶어

 

설화* 속 그 청상도 온몸이 아리어

봄날 끝자락엔 어쩔 수 없더란다

아귀에 미늘을 놓아 길손을 잡을밖에

 

순하디순한 황소가 뜸베질을 해댈 때

모르는 척 발길 옮겨 소맷자락 붙잡힐까

아니면 흰나비 되어 슬쩍 꿀이나 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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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전해져오는 실거리꽃 설화

    

 

부레옥잠

 

한 평 남짓 연못에 부레옥잠 놓았더니

공기주머니 매달고 이저리 떠다닌다

반생을 떠돌아다닌

내 오랜 친구 같은

 

언제나 뜬금없는

이 친구 전화 한 통

동문시장 순대국밥, 막걸리도 네댓 잔

저녁 배

예약했다며

목적지를 안 밝히던

 

7월 부레옥잠

연등 같은 꽃이 필 때

남도 어느 산사

터 잡았단 문자 몇 줄

 

이제는 뿌리내릴까

속연이 깊디깊다

    

 

 

시맞이

 

재촉한들 오겠느냐

시도

계절을 탄다

 

산딸나무 열매들

앞다퉈

젖을 흘릴 때

 

단풍잎

계류에 뜨듯

휘돌다가

에돌다가





♧ 가창오리 겨울나기


새들에게 언어 있을가 곰곰 생각하다

금강하류에 가 오래도록 귀를 연다

다문화 물새의 축전

겨울나기 한창이다


때마침 노을이 내려 개막쇼가 열리고

십수만 가창오리 일제히 날아올라

한순간 회오리 뜨듯

노을 화판 저 군무


마음 비워 가벼운지 떠오르고 내리고

감았다 풀었다 내 맘도 갸우뚱한다

해묵은 체증의 더께

시나브로 갈앉는다

새들은 저문 강에 시린 발을 담그느니

깨어 있어 다순 게 강물이 아니더냐  

느릿한 충청도 말로

물갈퀴를 간질인다

 

  


그런 시 어디 없을까

 

정말이지 시란 막걸리 아닌가 싶어

한두 잔 들이켜면 그냥 포만하고

적당히 취기가 올라

갈증을 풀어주는

 

그런 시 어디 없을까 콩나물해장국 같은

간밤의 쓰린 속을 시원히 달래주고

매콤한 그 맛 하나로

다시 또 찾게 되는

 

그런 시 어디 없을까 수박화채 같은 시

한여름 읊조리면 얼음이 동동 뜨고

팽팽한 세간의 틈에

계류를 흘려내는

 

  


차마고도


믿음 한 점 품고 설산 라싸로 간다

오체투지나 수레를 끄나 부처께 가는 거다

한 생을 길에 부린다 해도

그냥 내릴 싸락눈발

단출한 삶이지만 오가는 정이 있다

말이나 야크 등에 차를 싣고 소금을 싣고

봄여름 산을 넘으면 다랑이 마을은 겨울이다

고산지 하루해는 세상과 다르나니

마방의 눈과 귀는 어둠에도 순하다

한데서 노숙을 하고

불경을 독송한다

산은 물을 낳고, 물은 사람을 만나

가축의 마른 똥에 불씨가 피어난다

성과 속 경계를 지우는

금줄 같은 설산의 길

      

                    *홍성운 시조집버릴까(푸른사상 시선 96,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