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 지냈다기보다
세월이 흐르는 줄 모르게
누워서 지낸 지 한 달여.
마음대로 거동하지 못하고 귀찮으니까
차분히 생각하는 일도 싫고
오래 앉아 있지 못하니까
일도 하기 싫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이제 조금 걸을 수 있게 되니
바깥세상 안부가 궁금해
카메라를 들고 나서본다.
골목길,
몇 년 전엔 곱고 깨끗했던 사랑초가
이제 식구는 많이 늘었는데,
퇴색하고 헝크러져 있어
발길을 돌리려다가
어찌 보면 우리 사랑도
세월이 지나면 이처럼 편한 대로
진화하는 게 아닌가 하고
몇 장 찍어다
『우리詩』 5월호의 시편과 같이 올린다.
♧ 선 - 박원혜
선이 줄을 만들며 길을 걷는다
우리에게 보이는 선은 없다
그림자 세운 바닥이 힘이 되었다
위․`아래층 높낮이가 사라진지 오래다
가끔 습성이 된 언어들이 날선 선을 겨누고
달려든다 선의 몸집이 절벽을 오른다
산이 된 선의 몸집이 강과 숲을 건넌다
선과 선이 맞닿고 숲 속을 걷는 발이
바탕을 만들었다 줄로 모여들고 가끔씩
떨어지는 잎새에서 잡목의 울림이
선명한 시선을 잡아냈다
♧ 몸의 기도 - 정온유
내 몸이 한 번 씩 뒤척일 때마다
생각이 뒤척이고 마음이 뒤척이고…….
피 값에 물든 마음이
정리 되는 시간.
예배당 가는 길목
흐드러진 잘디 잔 바람이
부활의 아침을 찬양하듯 흐드러져 있다
봄빛을 털어내는 듯
온몸으로 부르짖는 듯.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움직이고,
과거와 미래가 하나 되어 움직이고
이 모든 세상을 끌어안고
온몸으로 뒤척인다 내가.
♧ 바람의 의자 - 방화선
바다가 보이는 능선 끝자락
돌 의자에 익숙한 바람이 앉는다
빛바랜 조등 하나 수평선에 걸려
슬픔을 만드는 중
뼛가루를 삼킨 포말은
격랑으로 일어서고
입을 닫아버린 너의 언어가
내 엉킨 감정을 만진다
눈물이기도 하고, 회한이기도 하고,
안식이기도 한,
남음과 사라짐은 반비례의 일상이라고
잔잔하게 웃어 보이는 너의 언어
먼 수평선은 다시 규칙을 정한다
익숙한 바람에 또 파도가 인다
♧ 봄, 봄 일기 - 이순향
무대 위의 배우들
봄 햇살에 다투어 등장
보랏빛 조막손 제비꽃
민들레 개나리
외진 산길엔
꺾어진 채
퇴장당한 버드나무
겨우내 비바람에 시달리다
이제사 짐 내려놓고
허리 편다
파르스름 물 오른
상처투성이 팔
종종걸음으로
봄은
구석구석
빠짐없이 찾아왔구나
♧ 쌍가락지 - 윤순호
환승역,
승강기에 몰린 행렬이 길다
터질 듯 배불뚝이 가방 하나가
서둘러 줄을 잇는다
치맛자락 거머쥔 비취반지가 얼핏 파랗다
가을걷이 매조지고
허리끈이 걷어 올린 옥색 치마가
고속버스를 탔다
아가리 미어진 가방이 넥타이 동여매고
잰걸음 하던 날
주인 따라 고단했을 비닐봉다리가
꾸역꾸역 꽁무니를 물었다
서리태와 팥 무말랭이며
비단주머니 풀어헤친 가락지까지
“땅만 파는 손구락에 가당키나 허냐,
닳아지면 아까운 게 쟈 줘라!”
짐짓
방구들 훈기만 측은히 살피던, 엄니
곱은 손가락
♧ 한 방울은 물의 씨앗 - 이기영
한순간,
가장 맑게 익었다
미련 없이 진다
♧ 소금쟁이의 사랑 - 전종대
무슨 깊은 인연이기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저 물 위에 떠 흐르는 바람처럼
그대 발아래 잠시 머물다 가는 낙엽이었으면 합니다
내 혼신 다하여 한번 스러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그런 사랑 말고, 스쳐 지나가는 소금쟁이 사랑처럼
사뿐사뿐 아픈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오직 맨발로 자국 없는 사랑 나누다
이 물가 언제 그대 있었느냐 듯이
바람은 또 불어오고 거짓말 같이 또 가을은 오고
물 한 방울 젖지 않는 발바닥 아래
내 등짝 짊어진 소금 한 짐 뿌리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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