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찔레꽃 향기 가득히

김창집 2019. 5. 28. 12:25


모처럼 나선 오름길

가는 곳마다 찔레꽃 향기 가득하다.

 

봄은 오롯이 나를 속이고

벌써 찔레꽃을 지우려 하고 있다.

 

하얀 색이 주는 깨끗함보다는

왠지 슬픈 느낌이 든다.

 

카메라를 들고 다가서는데

향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찔레꽃 - 김승기

 

콕콕 찌르지 마

하늘이 깜짝 놀라 일어서잖아

산줄기 가랑이에

한 손을 질러 넣고

다른 손으로 하늘을 감싸 안고

대지의 사타구니를 살살 문지르면서

우주를 핥는 거야

애무는 그렇게, 그렇게 하는 거야

너에겐 하늘을 덮을 수 있는

짙은 향내가 있어

입에서 단내가 솟구칠 때까지

허옇게 게거품을 흘리며

깊은 사랑을 해야 하는 거야

몸살 앓는 사랑으로

뜨거운 유월을 지내야

새 생명이 빨갛게 열매 맺히는 거야

자꾸만 콕콕 찌르지 마

우주와의 사랑은

깊게, 조심스럽게 하는 거야     


 


 

찔레꽃가뭄 소양 김길자

 

짭짜름한 세월의 땀 냄새가

가슴 아리도록 그리웠다고

철쭉꽃등 대문 밖 환히 밝히며

우물가 목련꽃 흐드러지게 핀 기억을

쓸쓸히 반기는 그곳은

 

참새소리가 아침을 열고

빨랫줄 타던 이슬이 마당에 떨어질 때면

밥상에 앉은 웃음소리가

탱자나무울타리 넘나들던 곳

 

입술이 타들어가던 찔레꽃가뭄*

땅이 갈라지는 통증 해갈할 단비 기다리며

텃밭에서 감자 캐던 새색시 손등엔

어느새 세월이 피워낸 검버섯위로

가느다란 바람 한줄기 스친다

 

자갈밭 같은 세월 눈물로 삭히며

반딧불이로 사시던 어머니

이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하는 기억에 매달리다

내 가슴에 꽂힌다.

 

---

*찔레꽃가뭄 : 모내기철이자 찔레꽃이 한창 필 무렵인 음력 5월에 드는 가뭄    


 

 

찔레꽃 필 무렵 - 박인걸

 

어머니 찢어진 삼베적삼이

가시나무에 가지에 걸려

쏟아지는 유월 햇살에

하얗게 바래고 있다.

 

보리 고개 넘어가느라

눈물마저 말라버린

감자밭에 앉은 어머니 얼굴이

찔레꽃처럼 창백하고

 

코흘리개 딸린 애들은

감자 한 톨에 눈이 빠지고

윤기 없는 얼굴 위로

찔레꽃 버짐이 번져갔다.

 

꿈마저 시들어버린

가난했던 유년의 추억이

찔레꽃 필 무렵이면

가시에 긁힌 듯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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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 반기룡

 

소복을 입은 채

다소곳이 명상에 잠겨있습니다

누이처럼 하이얀 빛으로

수줍은 듯 고분고분 매달려 있습니다

 

찔레 순 또옥 똑 분질러

배가 아프도록 오물거리던 시절이

몽글몽글 떠오릅니다

 

눈을 씀벅씀벅하고

누가 많이 먹었나 내기를 하며

배를 두들기던 모습이

안개처럼 피어오릅니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새하얀 웃음으로

아픔과 기쁨의 자웅동체로

찌를까 말까 찌를까 말까하며

백의민족처럼 피어있습니다     


 


 

찔레꽃 - (宵火)고은영

 

보아주는 이 없는

깊은 산,

그래서

물빛 서러움일레라

 

하이얀 미소

순결의 서약으로 떠도는

슬픈 입맞춤

외로운 몸짓일레라

 

우수수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깊은 언어의 침묵

, 고독한 사랑일레라

 

천년을 기다려도

만날 수 없는 임을 그리다

이는 바람에 포물선 그리는

너의 하얀 비망록     


 

 

찔레꽃 - 이현우

 

부활하는 넋인가 보다.

흙먼지 자욱한 포연(砲煙) 속에서

운명처럼 만났던 가시와 향기

멍울져 돌아앉은 산과 들마다

유월이면 네 모습 소복이었다.

낭자한 꽃싸움 풀숲에 묻고

홀연히 떠나버린 봄의 끝 자락

축배도 영화도 아랑곳 없이

오롯이 피어 오른 무명의 향불이여.

가난한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외로운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어울려서 사는 길 너무 멀어라.

끓던 여름 타는 가을 다 보내고

재 되어 물이 되어 겨울 강에 닿으면

하얗게, 하얗게, 더욱 아프게

쌓여가는 어둠 속 눈이 오리니

계절마저 잊었나 갈은리(葛隱里) 하늘

활짝 열고 부활하는 넋인가 보다    


 


 

찔레꽃 피고 뻐꾹새 울면 - 최범영

 

보리밭 둑에 앉은 찔레

덜 익은 보리 까먹으며 흰 꽃 피울 때

배고프다 우는 동생 보듬아 안고

일 나간 어머이 아부지 기다리는 누이

뻐꾹새는 초가집 바지랑대에 앉아 울었다

 

햇살 따갑던 어느 늦은 봄

민주주의가 조그만 알을 낳았고

알을 깨기도 전에

독재가 그 둥지에 총알을 깠다

알 깬 새끼, 주인들을 밀어내려 하자

피맺힌 뱁새들의 절규에

찔레꽃은 눈물 가득 피었다

 

공부에 한 들린 누이

찔레꽃 피고 뻐꾹새 울 때

대처로 식모살이하러 떠났다

배워야 산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보고싶은 고향 생각

찌든 가슴 찔레 꺾어먹으며 달래다

뻐꾹새처럼 울 망정

 

찔레꽃 피고 뻐꾹새 울면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졸업한

쉰 다 된 누이의 모습이

현대사의 승리인 양 울컥인다

    

 

 

찔레꽃 - 권경업

 

그 날, 처음으로

처음으로 내가 본 것은

한없이 투명한 가을하늘

가을하늘에 핀 찔레꽃이었습니다

 

아니 아니, 지금 피어서 어떻게

어떻게 겨울을 나려고

깔딱고개로 깔딱고개로

무서리는 넘어 와

 

아픔 몇 없다면 어찌 세상일일까

 

보시오, 땅 위는 다 아픔이라오

도선사 대웅전 부연 끝

뎅그렁, 풍경(風磬)을 울리며

가을하늘 날아오는 물고기 한 마리

 

! 윤회(輪廻)의 이 봄날

내 안에, 내 안에 가득한 만다라

하얀 찔레꽃 덤불

---

*깔딱고개 : 북한산 인수봉 오르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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