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정을 하다가 – 김창호
지친 어둠의 가지를
치려
전정가위를 든다
삭정이 절망 잘라내고
곰팡이 꽃으로
금간 이파리 따낸다
진드기 옮은 이파리 어둠은
겨울 지나
봄이 왔는데도
덤불처럼 쌓였다
태초부터 어둠은
부끄럼이 없다
지독히 까매서
차라리
꽃보다 예쁘다
♧ 자존심 – 임세훈
늘 시끄럽게 굴던 전화가
오늘따라 풀죽은 듯 다소곳하다
함께 매일 교차하던 가로와 세로가
묵은 기침 속에서 탐색 중
그늘에 늘린 햇살마저 떠났다
쉽고도 어려운 선택 뒤에 찾아든
하나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정일까
현실이 자존심 속에서 몸부림일까
일상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한
촉각, 감각, 시각을 맞추던 삶이
식기 전에 소금 꽃이라도 피워보자
옳고 그름은 먼 훗날에 맡기고
마음 밖 이야기라도 끄집어내자
♧ 계절의 윤회 – 김정희
노을 속 홍시감
기대듯이 않은 새 한 마리
어느 몽골족의 의식처럼
아낌없이 홍시는 먹히고
앙상한 뼈 조각처럼
가지가 덩그러니 남는다
옩너한 보시가 이루어지고
새하얀 눈으로 세상을 가린 후에야
가만히 깨어난 듯이
나무는 속살을 터트린다
봄은 오고 마는 것이다
♧ 달은 – 황금녀
힘든 게지요
가슴 아팠던 게죠
그렇지 않아도 홀로 된 터에
인생들 내려다보기 낯 뜨거워
가끔 구름으로 낯을 가리는 게죠
때론 인생들 황당함에 놀라
샛노랗게 변하는 게죠
오늘은 연못에 드는 게
몸도 마음도 씻고 싶은 거죠
달은
♧ 향기 – 한문용
광채는
눈에서 빛나고
믿음은 어깨를 겯게 하며
사랑은
온유를 빚는다
침묵은
좋은 생각을 숙성하고
참음은 행복을 구워내며
참은
어둠을 사른다
고요는
혼심을 재우고
베풀면 삶이 푸르며
곧음은
세상을 거꾸로 가게 하지 않는다
향기다
♧ 방황 – 김길언
내가 나를 품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풀어놓은 일상
허울 좋은 속빈 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나는 매몰찬 바람춤에 맞서지 못하고
울먹이며 피하기만 한
웃자란 풀 한 포기였습니다
가파른 지난 하루하루는
옹이 되어 삭히지 않아
퇴색되어 메마른 내 마음을
무겁게 누릅니다
♧ 서툰 미련 – 이지민
이깃장 부리던 무더위가
가지 끝 서성이는 가을을 보다
한숨 토해내듯 생을 쏟아붓고
이별도 아닌 것이 이별인 척
서툰 상처 하나 숨긴다
때가 되면 떠나게 마련인 걸
미련 없이 돌아서면 그뿐,
헉헉대던 폭염도 제풀에 지쳐
아쉬운 여름을 하직한다
버석이는 묵은 감정의 먼지 위로
가을이 통째로 오고
스치는 갈바람 따라
나무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함덕문학』제3호(함덕문학회, 2019)에서
* 사진 : 2018년 5월 3일(올레 19코스 취재 중 함덕을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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