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김진숙의 가을시편

김창집 2019. 11. 23. 16:58


가을이 가을에게

 

애월을 지날 때면 명치쯤에 얹힌 바다

사무치는 말 한마디 흘려보내지 못하고

풀벌레 우는 벼랑에 나를 세워 놓습니다

 

아무도 들이지 못한 가슴과 가슴 사이

겸손을 쓸어 모으는 사람도 낙엽이 되어

비우고 또 비우는 마음 처음처럼 읽습니다

 

사람이 지나온 길엔 버찌 같은 하루가

까맣게 뒹굴다가 고독고독 밟히는 밤

받쳐 든 세상 한쪽이 오래도록 묻습니다

    

 

구리역을 지나며

 

미완성의 이별과

플라타너스 상처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았으므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을을

퇴고하지 못한 채

빠져나온

구리역

    

 

빈집의 화법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 적 있었다

감물 든 서쪽 하늘 물러지는 초저녁

새들이 다녀가는 동안

버스가 지나갔다

 

다 식은 지붕 아래 어둠 덥석 물고 온

말랑한 고양이에게 무릎 한 쪽 내어주고

간간이 떨어진 별과 안부도 주고받지

 

누구의 위로일까

담장 위 편지 한 통

시청 복지과주소가 찍힌 고딕체 감정처럼

어쩌면

그대도 나도 빈집으로 섰느니

 

직설적인 말투는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좀처럼 먼저 말을 걸어오는 법이 없는

그대는 기다림의 자세,

가을이라 적는다

    

 

귀뚜라미

 

앞말 뒷말 잘라먹고

너도 옳다

그도 옳다

 

자정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는 난상토론

 

하현달

쫑긋 귀 세워

끄덕이고 있었지

    

 

물의 안쪽

 

강 건너 빗장을 풀고 누군가 올 것 같다

굽이굽이 접어두었던 그리움에 마냥 흘러

늦가을 먹먹한 가슴 끌어안는 두물머리

 

어쩌면 물과 물은 이별한 적 없었지

남과 북이 갈라져 등 돌려 흘러온 날에도

끝끝내 서로가 만나 손가락을 걸었으니

 

우리는 이곳에 와 물이 되어도 좋겠다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여울 속, 당신과 나는

물안개 다발로 피는 아침 푸른 만남을 보리니

    

 

소쩍새 운다

 

소길리 밤의 뜨락에 소쩍새가 또 운다

 

쪽 서쪽 살피다가 산쪽 산쪽 부르며

 

무자년 잃어버린 마을 솥단지를 찾나봐

 

팽나무 혼자 남아 지켜낸 마을 어귀

 

돌아갈 집을 잃은 앙상한 영혼을 위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소쩍새가 우나봐

 

 

         *김진숙 시집눈물이 참 싱겁다(문학의전당 시인선 0307)에서

                     *사진 : 이승악의 늦가을 풍경(2019.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