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이 가을에게
애월을 지날 때면 명치쯤에 얹힌 바다
사무치는 말 한마디 흘려보내지 못하고
풀벌레 우는 벼랑에 나를 세워 놓습니다
아무도 들이지 못한 가슴과 가슴 사이
겸손을 쓸어 모으는 사람도 낙엽이 되어
비우고 또 비우는 마음 처음처럼 읽습니다
사람이 지나온 길엔 버찌 같은 하루가
까맣게 뒹굴다가 고독고독 밟히는 밤
받쳐 든 세상 한쪽이 오래도록 묻습니다
♧ 구리역을 지나며
미완성의 이별과
플라타너스 상처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았으므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을을
퇴고하지 못한 채
빠져나온
구리역
♧ 빈집의 화법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 적 있었다
감물 든 서쪽 하늘 물러지는 초저녁
새들이 다녀가는 동안
버스가 지나갔다
다 식은 지붕 아래 어둠 덥석 물고 온
말랑한 고양이에게 무릎 한 쪽 내어주고
간간이 떨어진 별과 안부도 주고받지
누구의 위로일까
담장 위 편지 한 통
‘시청 복지과’ 주소가 찍힌 고딕체 감정처럼
어쩌면
그대도 나도 빈집으로 섰느니
직설적인 말투는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좀처럼 먼저 말을 걸어오는 법이 없는
그대는 기다림의 자세,
가을이라 적는다
♧ 귀뚜라미
앞말 뒷말 잘라먹고
너도 옳다
그도 옳다
자정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는 난상토론
하현달
쫑긋 귀 세워
끄덕이고 있었지
♧ 물의 안쪽
강 건너 빗장을 풀고 누군가 올 것 같다
굽이굽이 접어두었던 그리움에 마냥 흘러
늦가을 먹먹한 가슴 끌어안는 두물머리
어쩌면 물과 물은 이별한 적 없었지
남과 북이 갈라져 등 돌려 흘러온 날에도
끝끝내 서로가 만나 손가락을 걸었으니
우리는 이곳에 와 물이 되어도 좋겠다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여울 속, 당신과 나는
물안개 다발로 피는 아침 푸른 만남을 보리니
♧ 소쩍새 운다
소길리 밤의 뜨락에 소쩍새가 또 운다
서․쪽 서․쪽 살피다가 산․쪽 산․쪽 부르며
무자년 잃어버린 마을 솥단지를 찾나봐
팽나무 혼자 남아 지켜낸 마을 어귀
돌아갈 집을 잃은 앙상한 영혼을 위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소쩍새가 우나봐
*김진숙 시집『눈물이 참 싱겁다』(문학의전당 시인선 0307)에서
*사진 : 이승악의 늦가을 풍경(2019.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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