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가을 하늘 아래 빛나는 석류

김창집 2019. 11. 16. 00:06


  나이가 들면서 아무래도 계절의 감각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하기야 한 가지 일에 매달리면 그것밖에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까.

  일처리도 굼뜨다. 젊은 시절에는 그 많은 일을 하나하나 재빨리 처리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하나 처리하기도 버겁고 시간이 걸린다.

  또 하나를 처리하고 나서 다른 일을 바로 시작하기 어려워, 좀 휴식 시간을 가진 뒤라야 다시 시작하다 보니, 하지 못해 미뤄둔 일도 많다.

  그리고 어떤 사물에 대한 감동도 예전만 못한 것 같다. 가령 석류하면 폴 발레리의 시가 생각나는데, 지금 읽어보면 어딘가 번역이 서툴고 딱딱해 보인다.

  ‘알맹이들의 과잉에 못 이겨/ 방긋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아/ 숱한 발견으로 파열한/ 지상의 이마를 보는 듯하다

  차라리 다음 시구들이 자연스럽지 아니한가. 한국 사람들이니까.

 

 


석류 - 권오범

 

할 말 있거들랑 하고

속 거북하거들랑 토해버리지

뭐가 못마땅해

주둥이 뽀로통해가지고

얼굴이 불콰해지도록

냉가슴 앓게 뭐냐,

저러다 머잖아 볼 터지지

우울증이 송알송알

피투성이 되어

시금털털해질 테니까,

하여간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석류石榴 앞에서 - 고정국

 

1

 

꽃다운 열매들이

탄소처럼 기쁘게 탄다

 

거룩한 피로 빚은

금은보화를 내려놓으며

 

순순히 접사렌즈 앞에

이마 띠를 푸는 이여

 

2

 

고뇌가 빛으로 화한

그대 생애는 황홀했노라

 

무덤처럼 온유한

낙과 직전의 석류 한 알

 

아리네, 생살에 꽂히는

가을볕이

아리네    


   

석류(171) - 손정모

 

가시 돋친 줄기로

하늘 더듬어 오르다가

면면히 사무치는 열정일랑

허공을 향해 모아두자

 

치솟는 만큼 가라앉혔다가

선홍(鮮紅)의 설움

하얀 결정으로

여물 때까지

 

그리움이 봇물처럼 남실거려도

서운한 여운

끝내 아니 남기려

날마다 속살 어루만지다가

 

휘감기는 낙조에

불길처럼 번지는 안타까움

점차 전율로 버둥대며

슬며시 속살을 연다.

    

 

석류石榴 - 나희덕

 

석류 몇 알을 두고도 열 엄두를 못 내었다

 

뒤늦게 석류를 쪼갠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처럼

앙다문 이빨로 꽉 찬,

핏빛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네 마음과도 같은

석류를

 

그 굳은 껍질을 벗기며

나는 보이지 않는 너를 향해 중얼거린다

 

입을 열어봐

내 입속의 말을 줄게

새의 혀처럼 보이지 않는 말을

그러니 입을 열어봐

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이

내 혀를 적시도록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     


 

석류 알 빠알간 속사정을 누가 알랴 - 이복란

 

이 도령 댁 석류나무 한 그루

젖 몽울 맺힌 가시내의

수줍은 웃음이 걸렸다.

 

속 살 찢기 듯

아리게 아리게 열리는 순정,

열여섯 아랫마을

정임이의 초경하던 날

 

삐져나올 듯

삐져나올 듯

탱글탱글 한

석류 알 빠알간 속사정을 누가 알랴

 

암 수 노닐던 새들도

갈 섶을 파고드는 밤

윗마을 이 도령

책장 넘기는 소리만 무심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