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사라오름의 상고대로 피어나라

김창집 2020. 1. 9. 22:36


알몸 - 고재종

 

떠나는 그대, 그곳을 기억하리

산정을 휘감는 안개와도 산신령과도

한숨결로 섞이면 그만이던 곳

떠나는 그대, 그곳을 기억하리

안개 걷히면 산신령의 숨결인 상고대들이

가지마다 서리서리 끼쳐 있던 곳

때론 붉게 언 둥치에도 잎새는 더욱 푸른

눈주목이 눈보라와 밤새 겨루던 그곳

그 소리를 민박집의 장작불 끓는 방에서

 

뜨건 소주와 함께 밤새 들었었더니

떠나는 그대, 그곳을 잊겠는가

이제 여기서 내 이름 네 호명 지운대도

눈주목이 눈보라와 밤새 겨루던 그곳

    

 

 

상고대 - 채홍조

 

우유 빛 안개 피어오르는 날

하늘과 땅이 하나 되어

구름 속에 서있는 듯

순백의 세상 속으로 빨려든다

 

서리꽃 눈부신 면사포 쓰고

선잠 깨어나는 소나무 아래

연미복 차려입은 까치들

해 맑은 노래

푸새 위에 은빛으로 반짝인다

 

갈참나무 잎

바삭거리는 산길 따라

대 숲을 흔드는

한 무리 박새, 재재거리며

은도금한 하얀 숲 속으로 녹아든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고개 숙인 억새 헝클어진 머리

삭아 주저앉은 관절마다

바래 서걱이며 부러진 날개 위에

서럽도록 아름다운 별빛으로 내린다

    

 

 

상고대 서리꽃 - 김종제


당신의 창문을 열고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니

세상의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꽃을 가졌다

하늘 아래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선물을 가졌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안개나 구름이 미끄러져

영하로 급강하 추락하다가

서리나 이슬이 되어

사랑으로 엉겨 붙었다

바닷속 예쁜 산호꽃이 피었다

상고대라고 불리는 꽃

눈으로 볼 수 있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특별하고 값 비싼 마음을 가졌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희망의 수다를 떨면서

이야기꽃이 활짝 피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서로 닮아있는 겨울산이

북극의 곰처럼 순하고 맑다

상고대 서리꽃 피는 것이란

찬 기운에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 맞대고 앉아

마음 뭉쳐지는 일이다

주검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자리 같이 하면서

힘이 되어 주는 일이다

    

 

 

* 이번 겨울은 별로 춥지도 않고 눈도 안 와서

   벌써 산남에 매화가 피었다고 야단들이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느냐며

   지난 일요일 한라산 사라오름에 오른 친구들

   분화구 바닥에 고인 물의 살얼음과 서리 사진만 올렸다.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제 맛인 것을,

   상고대도 습한 기운, 낮은 기온과 기압

   그리고 찬바람까지 어울려야 피어나는 법.

 

   그러고 보면 모든 게 인연이 닿아야 만나니,

   어쩔 수 없이 지난겨울 사진이라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