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몸 - 고재종
떠나는 그대, 그곳을 기억하리
산정을 휘감는 안개와도 산신령과도
한숨결로 섞이면 그만이던 곳
떠나는 그대, 그곳을 기억하리
안개 걷히면 산신령의 숨결인 상고대들이
가지마다 서리서리 끼쳐 있던 곳
때론 붉게 언 둥치에도 잎새는 더욱 푸른
눈주목이 눈보라와 밤새 겨루던 그곳
그 소리를 민박집의 장작불 끓는 방에서
뜨건 소주와 함께 밤새 들었었더니
떠나는 그대, 그곳을 잊겠는가
이제 여기서 내 이름 네 호명 지운대도
눈주목이 눈보라와 밤새 겨루던 그곳
♧ 상고대 - 채홍조
우유 빛 안개 피어오르는 날
하늘과 땅이 하나 되어
구름 속에 서있는 듯
순백의 세상 속으로 빨려든다
서리꽃 눈부신 면사포 쓰고
선잠 깨어나는 소나무 아래
연미복 차려입은 까치들
해 맑은 노래
푸새 위에 은빛으로 반짝인다
갈참나무 잎
바삭거리는 산길 따라
대 숲을 흔드는
한 무리 박새, 재재거리며
은도금한 하얀 숲 속으로 녹아든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고개 숙인 억새 헝클어진 머리
삭아 주저앉은 관절마다
바래 서걱이며 부러진 날개 위에
서럽도록 아름다운 별빛으로 내린다
♧ 상고대 서리꽃 - 김종제
당신의 창문을 열고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니
세상의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꽃을 가졌다
하늘 아래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선물을 가졌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안개나 구름이 미끄러져
영하로 급강하 추락하다가
서리나 이슬이 되어
사랑으로 엉겨 붙었다
바닷속 예쁜 산호꽃이 피었다
상고대라고 불리는 꽃
눈으로 볼 수 있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특별하고 값 비싼 마음을 가졌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희망의 수다를 떨면서
이야기꽃이 활짝 피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서로 닮아있는 겨울산이
북극의 곰처럼 순하고 맑다
상고대 서리꽃 피는 것이란
찬 기운에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 맞대고 앉아
마음 뭉쳐지는 일이다
주검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자리 같이 하면서
힘이 되어 주는 일이다
* 이번 겨울은 별로 춥지도 않고 눈도 안 와서
벌써 산남에 매화가 피었다고 야단들이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느냐며
지난 일요일 한라산 사라오름에 오른 친구들
분화구 바닥에 고인 물의 살얼음과 서리 사진만 올렸다.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제 맛인 것을,
상고대도 습한 기운, 낮은 기온과 기압
그리고 찬바람까지 어울려야 피어나는 법.
그러고 보면 모든 게 인연이 닿아야 만나니,
어쩔 수 없이 지난겨울 사진이라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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