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면암 선생의 '유한라산기'에서

김창집 2020. 1. 23. 14:06

♧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 면암 최익현

 

  고종 10년(1873) 겨울에 나는 조정에 죄를 지어 탐라(耽羅)로 귀양을 갔다. 하루는 섬사람들과 山水(산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내가 말하기를, “한라산의 명승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읍지(邑誌)를 보거나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구경한 이가 아주 적으니, 갈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인가?”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이 산은 4백 리에 뻗쳐 있고 높이는 하늘과의 거리가 겨우 한 자 정도로 5월에도 눈이 녹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상(頂上)에 있는 백록담(白鹿潭)은 곧 뭇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던 곳으로 아무리 맑은 날이라 할지라도 항시 흰 구름이 서려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세상에서 영주산(瀛洲山)이라 일컫는 곳으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에 들어가니 어찌 범상한 사람들이 용이하게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하므로, 나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중략)

 

  위에서 흘러내린 물의 흔적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얼음과 눈이 특출나게 빛나고 여러 잡목들이 위와 옆으로 뒤덮여 있어 머리를 숙이고 기어가느라고 몸의 위험이나 지대가 높은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모두 6, 7리를 나아갔다. 여기에 이르니 비로소 상봉(上峯)이 보이는데 흙과 돌이 서로 섞이고 평평하거나 비탈지지도 않으며 원만하고 풍후한 봉우리가 가까이 이마 위에 있었다. 봉우리에 초목이 나지 않았고 오직 푸른 이끼와 담쟁이 넝쿨만이 돌의 표면을 덮고 있어서 앉아 휴식을 취할 만하였다. 높고 밝은 전망이 확 넓게 트여서 해와 달을 옆에 끼고 비바람을 어거할 만할 뿐 아니라, 의연히 진세의 세상을 잊고 홍진에서 벗어난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중략)

 

  석벽에 매달려 내려가서 백록담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일행은 모두 지쳐서 남은 힘이 없었지만 서쪽을 향해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절정이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조금씩 올라갔다. 그러나 따라오는 자는 겨우 3인뿐이었다. 이 봉우리는 평평하게 퍼지고 넓어서 그리 까마득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로는 별자리를 다다르듯 하고 아래로는 세상을 굽어보며, 좌로는 부상(扶桑)을 돌아보고 우로는 서양을 접했으며, 남으로는 소주(蘇州)ㆍ항주(杭州)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內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옹기종기 널려 있는 섬들이 큰 것은 구름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는 등 놀랍고 괴이한 것들이 천태만상이었다.

 

  맹자(孟子)에 ‘바다를 본 자는 뭇 것이 물로 보이지 않으며,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인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孟子 盡心上).’하였는데 성현의 역량을 어찌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소동파(蘇軾)에게 당시에 이 산을 먼저 보게 하였다면 그의 이른바, ‘허공에 떠 바람을 어거하고[憑虛御風(빙허어풍)],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羽化登仙(우화등선)].’는 시구가 적벽(赤壁)에서만 알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회옹(朱子)이 읊은, ‘낭랑하게 읊조리며 축융봉을 내려온다[朗吟飛下祝融峯(낭음비하축융봉).’라는 시구를 외며 다시 백록담 가로 되돌아오니, 종자들이 이미 밥을 정성스럽게 지어 놓았다. 곧 밥을 나누어 주고 물도 돌렸는데 물맛이 맑고도 달기에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맛은 금장옥액[金漿玉液(금장옥액) 신선이 먹는 선약]이 아니냐?”하였다. (하략)

 

  - 1월도 하순 24절기의 마지막인 대한(大寒)을 넘어가는데, 사흘 동안 겨울비가 내린다. 이번 겨울은 평상시에 그렇게 흔히 가던 눈밭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입춘(立春)을 맞을 것 같은 예감이다.

 

   이런 비는 한라산의 기온에 따라 눈을 녹여버리든지 아니면 눈으로 변해 한라산을 온통 덮어버린다. 비 오는 날에는 구름 때문에 한라산을 바라볼 수도 없어 어떻게 변했는지 도통 알 수도 없다.

 

  면암(勉庵) 선생이 유배 왔다가 거닐었던 자취를 따라 걷는 ‘면암 유배길’을 걸은 이야기를 쓰려고 앉으니, 한라산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1875년(고종 12년) 당시 면암 선생의 한라산을 보고 난 소감을 쓴 ‘유 한라산기’의 부분을 오랜만에 돌아본다.

 

 

  원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는 한문으로 되어 있는 글인데, 민태식(閔泰植) 선생이 우리말로 옮겨 한때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서 여러 번 가르쳤던 기억이 새롭다. 하긴 정년한 지도 벌써 10년이 흘렀으니까.

 

  사실 면암 선생은 1873년 겨울에 유배 와서 1875년 봄에 풀렸기 때문에 제주섬에 머무른 게 고작 1년 남짓밖에 안 된다. 당시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고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았기에, 예사 사람들은 한라산에는 가려고도 하지 않고 제대로 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젊은 나이에 탐구심도 많았고, 또 기회를 놓치면 기약도 없기에 산행을 단행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국내외적으로 너무 알려져 등산객의 발길에 산이 몸살을 앓을 정도여서 2월부터는 인원을 한정하여 시범 예약제를 실시한다 하니, 격세지감이 있다. 어떻든 평소 찍어둔 한라산 설경과 함께 그 일부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