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벚꽃 연가 - (宵火)고은영
어느 사랑이 한 점 아름다운 꽃이 되기 위하여
이 봄 미명(微明)을 열고 웨딩마치를 울릴까
어느 사랑이 인화되어 아름다운 흔적
소복의 미쁜 미소로 화르르화르르 피어날까
4월 벚꽃이 피면
미완의 사랑들이 시집가고 장가간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사랑과 삶을 꿈꾸며
벚꽃잎 흐드러진 저 꽃길에
꽃잎이 질 때까지 웨딩마치가 울려 퍼진다

♧ 벚꽃길 나들이 가자
하루 낯짝이 부끄럽도록
저 나무들은 잎새마다 뾰족 새움이 돋고
새들은 주둥이만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사랑을 울부짖으며
아름아름 영혼의 사랑을 수놓네
윤중로 벚꽃도 올 봄은 시름겨운데
사랑이라는 것이 원래
초를 다퉈 흐르다 서로 엉키고
급기야는 둘이 하나가 되고
셋도 하나가 되고 수십 개가 합체되어
하나의 큰 줄기를 이루고
생명의 소스로 화알짝 피는 일이긴 하지
꽈배기처럼 꼬이던 청춘이
느슨하게 풀린 기억도 없는데
시간은 그저 무덤덤하고 식상해진 요즈음
참한 새악시처럼 다소곳한 꽃의 빛깔에
아, 나는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뛰겠어
시간의 곱디고운 배웅을 받으며
상큼한 애인아
늙은 사랑아
오늘 나랑 벚꽃길 나들이 갈래?

♧ 꽃바람
저 화사한 꽃등에 내 가슴이 탄다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면 내가 흔들린다
윤중로엔 벚꽃 축제가 한창이고
이 환한 대낮에 꽃불을 켠 어디나 봄날이라네
형체도 없이 부서진 나의 꿈은
어디로 흘러간 것이며
또 어디로 정처 없이 걷는 것이냐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의 미로를 굽이치다가
더욱 쓸쓸해지는 시간
행복한 전주곡에 눈물 머금은 꽃들은
거리마다 혼불을 내걸었구나
비관적인 관점에서 비스듬히 누운 진부한 삶은
뼈마디조차 시린 법
아침엔 또 얼마나 많은 양의
식은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냐
총명했던 눈동자도 누렇게 뜨고
낮달처럼 투명한 슬픔의 사월
갈 길을 몰라도 걸어가야 만 할 인생
정착지가 없어도 걸어가야만 할 인생
목적이 없으니 어떤 수단도
비굴 질 일이 없어 좋다마는
꽃바람 한철 여기저기 행복한 비명에
내가 거꾸러지는구나

♧ 봄, 그리고 로망스
어둠 사이로 은근히 울리는
그대 목소리엔
늘 익숙한 외로움이 묻어 있다
외로운 거니? 내가 묻는다
앞으로
어떤 여유를 가져야 하나
생각해요
그리고
그대가 지난 흔적에도
어제는 꽃 비가 내렸다
사실 이 봄에
꽃들의 웃음과 더불어
나는 씩씩하지만
그림자는 언제나 쓸쓸하더라
그러게 모든 건 찰나이다
꽃 비 사이로 그대의 발자국은
점점 트릿해져 가는데
띄엄띄엄 마지 못해 입을 열던
그대의 입술로 목련이 지고
벚꽃도 화르르 지고 있다

♧ 스무 살의 첫사랑 그 푸른 별리(別離)
그 봄에 벚꽃 색 고운 셔츠에
풀잎 색 스커트를 입고 그 오빠를 만났다
종로였던가
우리는 탁구를 쳤다
그리고 어느 찻집에서 차를 마셨으리라
떨리는 손길로 뜨거운 커피를 마셨으리라
떨림을 주체하지 못해
내내 쩔쩔매다가 그날 그렇게 헤어진 게 다였다
오랫동안 편지로 주고받던 안부들이
지레 겁을 먹고 수줍음으로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원점으로 돌아왔던 그 허망하고 희멀겋던 허무
그 오빠를 의식하는 동안 가슴에 묻었던 한 마디
나는 어떤 말로도 내 사랑을 내비치지 못했다
아무런 말도 못했다
상처로 돌아온 첫 사랑의 치명적인 독소
몰랐다
내게도 가질 수 없는 사랑이 은밀하게 허물어지고
절망이란 어휘가 주는 무게가
그토록 초라하고 무력한 싹을 틔워야 하는지
첫사랑 스물 잔치는 혼자 속을 끓다
덜컥 추운 겨울 기다란 골목에 놓여진
그리움의 발자국들만 점점이 빛나던 자조적 슬픔이
홀로 울다 스러져 버린
이. 름. 없. 음.
빈터만 남은 어눌한 미완에서
서로에게 아무런 언약도 약속도 할 수 없던
무지한 용기나 객기도 없이 연약했던 사랑은
한 잎의 풀잎처럼 가볍고 작아진 모습으로 흔들리다가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 ‘소화 고은영 Gallery & Poem’에서

-- 어젯밤 손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마침 서사로 쪽으로 오게 되었는데,
올해 전농로의 벚꽃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
궁금하여 그쪽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해마다 이곳에서 주민들이 벚꽃잔치를 열어왔는데
올해는 코로나19로 중단한다는 소식을 접한지라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꽃은 여전할 거’란
바람를 저버리지 않고 조명기구를 마련해서
여러 색의 빛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벚꽃이 원래 가지고 있는
흰빛을 좋아하지만
은은한 여러 가지 색감의 변화는
또 다른 맛을 준다.
혼자 보기가 아까워서 휴대폰을 꺼내들고
닥치는 대로 찍어 여기 내보내며
내년에는 모두 건강하게 왁자지껄 모여
여는 흥겨운 잔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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