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난꽃이 피면
Ⅰ
아무도 가지 않은 눈 위를
가고 있는 사람
모든 길이 눈 속으로 사라지고
길이 없는 이승을
홀로서 가는
쓸쓸한,
쓸쓸한 등이 보인다.
Ⅱ
진초록 보석으로 날개를 달고
눈을 감고 눈을 뜬다
만 가지 시름이 적막 속으로 사라지고
가장 지순한 발바닥이 젖어 있다
내장산 비자림 딸깍다릴 지날 때에도
영원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거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
투명한 이른 봄날 이른 아침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인의 중심中心
실한 무게의 남근男根이 하늘에 걸려 있다.
-『대추꽃 초록빛』(1987, 동천사)

♧ 무위無爲의 시詩
-愛蘭
너는
늘
가득 차 있어
네 앞에 서면
나는
비어 있을 뿐……
너는 언제나 무위의 시
무위의 춤
무위의 노래
나의 언어로 쌓을 수 없는 성
한밤이면
너는 수묵빛
사색의 이마가 별처럼 빛나, 나는
초록빛 희망이라고
초록빛 사랑이라고
초록빛 슬픔이라고 쓴다
새벽이 오면
상처 속에서도 사랑은 푸르리니
자연이여
칠흑 속에 박힌 그리움이여
화성華星의 처녀궁에서 오는
무위의 소식
푸른 파도로 파도를 밀면서 오네.
-『애란愛蘭』(1998, 우이동사람들)

♧ 소심 개화素心開花
한가을 둥근달
맑은 빛살로
바느질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밤 도와 마름하여
첫날밤 지샌
새댁
정화수
앞에 놓고
두 손 모으다
바람도 자는데
바르르
떠는
하늘빛 고운 울음
영원 같은 거
엷은 고요
무봉천의 한 자락
홀로 맑은
지상의 한뼘 자리
젖빛 향기 속
선녀 하강하다.
-『은자의 북』(1992, 작가정신)

♧ 난초꽃 한 송이 벌다
처서가 찾아왔습니다 그대가 반생을 비운 자리에 난초꽃 한 송이 소리 없이 날아와 가득히 피어납니다 많은 세월을 버리고 버린 물소리 고요 속에 소심素心 한 송이 속살빛으로 속살대며 피어납니다 청산가리 한 덩이 가슴에 품고 밤새도록 달려간다 한들 우리가 꽃나라에 정말 닿을 수 있겠으랴만……,
피어나는 꽃을 보고
그대는 꽃이 진다 하고 나는 꽃이 핀다 하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지면서
목숨은 피어나는데……,
참 깊은 그대의 수심水深
하늘못이네.
우리가 본시부터
물이고 흙이고 바람이 아니었던가
또는 불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물빛과 하늘빛 속에는 불빛도 피어나 황토빛 내음까지 실렸습니다 올해에도 여지없이 처서가 돌아와 산천초목들이 숨소리를 거르는데 늦꽃 소심 한 송이 피어 깊이깊이 가슴에 들어와 안깁니다.
푸르르르르 백옥 같은 몸을 떨며 비비며 난초꽃 한 송이 아프게 피었습니다.
-『애란愛蘭』(1998, 우이동사람들)
*홍해리 시선집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도서출판 움)에서

--매해 3월 중순에 제주의 동양란들을 모아
같이 감상하는 ‘동양란 전시회’가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소식이 없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전시회에 가 눈 호강하던 기회가
올해는 없어진 셈이다.
하여
전에 찍어둔 사진을 보다가
몇 장 골라
난을 좋아하시는 홍해리 시인의 시와 함께
여기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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