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라산 둘레길인 ‘돌오름길’을 걷고
돌아오는 길에 1100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제주의 람사르 습지 중 하나인 1100습지 관찰로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많은 꽃이 사라진 6월말이어서
유독 이 산딸나무 꽃에 눈길이 갔습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나비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지만
이 꽃의 꽃잎처럼 보이는 하얀 잎 4장은
꽃받침 역할을 하는 포(苞)입니다.
자세히 보면 진짜 꽃은 가운데 열매 모양의 둥그런 곳에
모아져 아주 작게 꽃을 피웁니다.
나뭇잎이 울창한 계절이어서
멀리서 꽃처럼 보이게 하여 벌나비를 모으고
수분이 끝나면 이처럼 점이 나타나고
서서히 마르면서 떨어집니다.
♧ 큰넓궤 겨울 볕뉘
흐린 물빛 같은 전생(前生)의 사랑
다시 한 번 하기 딱 좋은 날
바람 한 점 잠시 머물지 않는
수척한 겨울 숲
몸 아픈 겹겹의 나뭇가지 뚫고 내려앉는
겨울 볕뉘 가느다란 길 따라
재채기하듯 피어나는 흰빛 작은 동백들
오래도록 아껴 둔 이 존중(尊重)의 겨울 볕뉘 아래
밑바닥 다 내보이며 걸어온 비린 길도
겨울 물빛 속으로 끝없이 자맥질해 들어가던 발길질도
캄캄한 바닥에 가라앉은 차디찬 침묵의 몸 안쪽도
흘수선에 도달하지 못한 희미한 맥박도
공손히 부려 놓고
누가 본들 어쩌랴
누가 몰래 읽은들 어쩌랴
늦어도 너무 늦게 도착해 밀어내지 못하고
무안하지도 않은 이 입맞춤
시린 침묵으로 가득 찬 이승의 첫 입맞춤
분홍빛 환하게 물든 오른뺨에 물그림자처럼 내려앉는 아픈 겨울 볕뉘
흐린 물빛 같은 전생의 사랑,
겹겹이 물이랑 기어이 기어이 건너오는
큰넓궤 늦은 오후
♧ 숨비나리*
아침, 서귀포에서 西로 西로 내달리다 보면
왼뺨을 비추던 햇빛이 어느새 오른뺨을 비춘다
꼭 그쯤이다
西가 東으로 갑자기 방향이 바뀌는 곳, 숨비나리
스치듯 지나가다 숨비나리가 변곡점이 되어
西로 달리던 내가 東으로 달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지구가 둥글고 섬이 둥근 탓이다
작은 섬 물빛에 떠 빙빙 돌고 있는 탓이다
左와 右가 한순간 뒤바뀌고
東과 西가 서로 소용돌이치는 숨비나리
쭉 뻗은 4차선 우회도로 새로 생겨
그곳 지날 일 적어졌지만
내 몸에 굳게 새겨진 문장(紋章)을 무너뜨리는 곳
우회도로 아닌 그곳으로 가끔 간다
우회도로는 시간의 흐름마저 함께 몰고 가는 것이어서
숨비나리에서의 시간은 물 깊이 자맥질해 들어간 듯 멈춰 보인다
꼭 그쯤, 그쯤에 동광 육거리가 있다
흐린 달빛 아래 속 얘기 두런두런 흘러나오는
헛무덤 몇 떠 있다
섬의 東西 대척점 한꺼번에 다 품은 숨비나리
멀리서라도 수척한 눈빛 총총 떠 있는 헛무덤 몇 보시게
두런대는 속 얘기 잊지 말고 들어 보시게
호이호이 세상 향해 내뱉는 숨비소리,
턱밑까지 차오른 속 얘기 꼭 들어 보시게
--
* ‘물속에 자맥질해 들어간 것 같은 분지’라는 의미의 동광리 소재 지명.
♧ 취우翠雨* - 정찬일
봄비 맞습니다. 누가 급히 흘리고 갔나요. 밑돌 무너져 내린 잣담**에서 밀려나온 시리*** 조각. 족대 아래에서 불에 타 터진 시리 두 조각 호주머니 속에서 오래도록 만지작거립니다. 손이 시린 만큼 시리 조각에 온기가 돕니다. 온기 전해지는 길에서 비 젖는 댓잎 소리 혼자 듣는 삼밧구석입니다. 푸른 댓잎에 맺힌 빗방울 속이 푸릅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이 흔들리고, 빛 속에 숨었던 얼굴들 다 드러나고, 누구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진저리치는 생으로 불거진 물집 하나 서러운 적요로 붉게 물든 열매 하나조차도 투명하게 사그라지는
내게 와서 내가 되지 못한 눈빛들이, 돌을 뚫고 깨부수던 말들이, 견고한 나무의 길로 위장했던 내 비린 상처들이, 어둠을 혼자 견뎌내던 새들조차도 흔들리며 다 흩어지겠습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몸으로 번지는 비취색 나뭇잎 하나 배후로 삼아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단 한 번도 따뜻한 적 없는 시리 조각에 잠겨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주머니 속 시리 두 조각, 긴 세월 지나도 맞부딪치는 소리 잇몸 시리게 쩡쩡거립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
* 푸른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
** 자갈을 쌓아 올린 담벼락이나 돌무지.
*** ‘시루’의 제주어.
*정찬일 시집 『연애의 뒤편』(문학수첩, 20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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