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마다 숲을 보아도 - 김청광
날마다 숲을 보아도
숲의 모습 다 볼 수 없네
뻐꾸기 산비둘기 꿩 울음소리
진종일 숲의 소리를 들어도
들을수록 귀는 멀고
이팝나무 아까시 향기
숲의 냄새
어머니 분 냄새
썩어가면서도
이끼며 버섯이며 벌레를 키우는
길게 누운 나무 등걸
이것이 숲의 품인가
어머니 젖가슴인가
푸른 잎 반짝이는 숲속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으며
침묵으로 몰입하는 나무들 사이사이
바람은 산책하듯 불어와
우듬지 쓰다듬으며 사라지고
날마다 숲에 서 있어도
숲의 마음 다 알 수 없어 해질녘
나만 홀로 다시 숲 언저리
언제쯤 풀잎 같은 진실한 사랑
그대 가슴에 닿아
숲의 한 줌 흙이 되어도
부끄럽지 않을까
♧ 천태산 은행나무 주장자 아래서 – 김혜천
중심에 심지 하나 꽂고 산다 여겼으나
경계 일어날 때마다
바람처럼 흔들리는 이파리였어요
당신은 잡음 없이 부여잡고 미동도 하지 않는 성자
날아드는 목숨은 날파리도 안아 잠재우는 보살
삼배로 친견하고 묻습니다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 그 천년의 탄식은
누구를 위한 울음입니까
여름이 날로 독해져도
멈춤 없이 흥청거리는 지구의 끝은 어디입니까
절집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내 놓아라 못 내 놓는다 진흙탕 속입니다
이대로 흘러가도 되는 겁니까
목마름 끝이 없는 이 문둥이는
무엇을 잡으려고 엉덩이 진물 나도록 틀어앉아
손사래를 치는 것입니까
잡음 없이 미동도 하지 않는 성자여
치소서
주장자로 치소서
대롱대롱 매달린 한 잎 이파리의 혼미를 깨우소서
♧ 아침을 여는 이 누구인가 - 박일소
엷은 안개 너울 펼쳐 놓은
환희의 빛깔로
살며시 다가와
그리움 안고
아침을 여는 이 누구인가
이슬 젖은 꽃이 아름다워
별빛으로 가슴을 밤새 열어 놓고
시리도록 피어
눈부시게 웃고 있는데
매정하게 닫아버린 마음
꽃 아래 마음의 거울을 놓고
밤새 마신 그리움이란 술
꽃은 제 그림자에 취해
더 아름답게 홀로 피어
가슴속으로 흐르는 빛
더욱 찬란히 떠오른다
생각은 흩어져 구름처럼 날리고
그 구름에 새긴 마음
그대 모습 묻었는데
쓸슬했던 기억
황량한 꿈이 남아
외로움만 깊어진다
어제 밤 흐르던 탁류가 멈추고
잠시 먼 나라 꿈속을 헤매던
아린 가슴을 열어
속속들이 가을 햇살에 말려도
그대 없는 삶은 빛이 아니기에
먼 곳에서 그대를 바라보며
그리움으로 꽃피우고
꽃잎이 흩어져 날려도
사랑할수록 더 쓸쓸해지는 날
아침을 여는 이 그 누구인가
♧ 한강 - 배택훈
거대한 도시에 기계처럼
움직이는 인간들 각자는
누구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한강 속에 물방울이
보이지 않듯이
바위에 부딪히는 한줄기 강물에
겨우 작은 물방울로 튀어
오를 뿐이다.
물방울조차도 순식간
강물에 휩쓸려 사라진다.
위대한 인간이 물방울이라고
한강은 말한다.
♧ 관절염 - 우정연
눈물 한 방울
바람 한 자락
그대의 눈빛 한 움큼
저만큼 서 있는 풀꽃 한 송이
가슴 깊숙이
옹이처럼 알알이 박힌 생채기들
마디마디 맺혀 있는 삶의
응어리가 늦바람처럼 피어나는 꽃
나를 서 있게 하는 힘
♧ 생명이 잠자는 사막 - 인민아
가고 가고 또 가도
끝없는 모래 평야
땅 끝 잘린 아득한 지평선 위
흰 구름 유유히 하늘가에 노닌다
수 억 만년 바람에 쓸려 다니며
정처 없이 떠돌다 지쳐버린
부스러진 돌 알갱이 모래 방랑자
지구의 서북방 한 자락에 자리 잡고
붉게 끓어오르는 지열 위에
황량한 사막 집을 지었는가
바싹 마른 모랫바닥 헤집고
숙명처럼 솟아난 연약한 식물
갈증에 시달리며 살갗이 타들어간다
자원이 숨 쉬는 기름진 토양
물보라 흩어지는 초연한 원시림
신기루에 가린 오아시스는
물안개에 싸여 시야가 멍멍하구나
♧ 계룡산․1 - 전민
-역사의 발원
영산 백두에서 기지개를 켜자
발끝은 소백산으로 쭉쭉 뻗다
무릎 속리산을 뛰어 넘어, 한라
뒤돌아보니 이웃사촌 대둔산
계룡산에 멈춰 암태극을 그리며
숫태극과 만나 천지음양의 이치
하늘과 땅 화합해 산천을 빚고
신비한 그대, 영산 계룡산이네
숫용추 물줄기 암용추에 꽂히여
두 계천을 잉태하며 갑천을 낳고
충북, 영동, 옥천에서 섞여진 물
신탄진에서 가족 만나 비단강에
계룡산 북쪽을 삥 휘돌아 나와서
웅진 사비 갱개미 어깨동무하고
서해 바다로, 인도양 태평양으로
산 강의 덕이 합해 역사의 발원
* 『산림문학』2020년 여름호(통권 3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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