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정호승 시 '바닥에 대하여' 외 3편

김창집 2020. 7. 30. 11:56

바닥에 대하여 - 정호승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보아라

첫눈 내리는 새벽 눈길 걸을 것이니

지난 가을 낙엽 줍던 소년과 함께

눈길마다 눈사람을 세울 것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보아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던 사람들이

눈사람을 만나러 돌아올 것이니

살아갈수록 잠마저 오지 않는 그대에게

평등의 눈물들을 보여주면서

슬픔으로 슬픔을 잊게 할 것이니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말고

부질없이 봄밤의 기쁨을 서두르지 말고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 보아라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 가면은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

 

무릎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너도 무릎을 끓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느냐

차디찬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

무릎을 꿇고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

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

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

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 - 정호승 시선집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랜덤하우스중앙, 2005)에서

                    * 사진 한라산 숲(포토샵 수채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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