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닥에 대하여 - 정호승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보아라
첫눈 내리는 새벽 눈길 걸을 것이니
지난 가을 낙엽 줍던 소년과 함께
눈길마다 눈사람을 세울 것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보아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던 사람들이
눈사람을 만나러 돌아올 것이니
살아갈수록 잠마저 오지 않는 그대에게
평등의 눈물들을 보여주면서
슬픔으로 슬픔을 잊게 할 것이니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말고
부질없이 봄밤의 기쁨을 서두르지 말고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 보아라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 가면은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
♧ 무릎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너도 무릎을 끓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느냐
차디찬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
무릎을 꿇고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
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
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
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
♧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 시 - 정호승 시선집『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랜덤하우스중앙, 2005)에서
* 사진 – 한라산 숲(포토샵 수채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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