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절초 꽃 - 김용학
영평사 산길을 가다
문득 발길을 멈춘다
가을 이슬로 목을 축이며
줄기 끝에 피어나는 선모초仙母草
눈처럼 흰 구절초가
하얀 물감을 풀어 깨끗하다
저 순결무구한 흰 빛깔을
어찌 쳐다 볼 수 있는가
내 속에 묻어있는 얼룩이
부끄럽기만 하다
변변한 약조차 없던
유년시절 할머님과 어머니가
엿 만들어 먹던 모습 떠오른다
이 꽃이 지면 가을도 진다
한적한 산길에 피어있는
구절초 꽃처럼 소박하게 살다 가신
어머님이 오늘 따라 더욱 그립다.
♧ 나뭇잎, 그리고 타버린 나날 - 김인숙
불현 듯, 기억을 묻는 일은
뼈아픈 자책의 시간이다
읽고 난 책들이 나무 밑에서
축축하게 밟힐 때가
가물가물한 일들은 모두가 비슷한 키여서
앞 뒤 순서를 헤치고
여기, 라고 말 할 때
여러 방향으로 서로 엇갈린 우리들의 밀회密會들
그래, 굴러서 온 것이 겨우
고작, 이 가을인가
이 나무 밑을 서성거리는 일인가
흐릿한 부싯돌로 파란 불꽃을
활활 다시 한 번 태워보겠다는 심사인가
잿더미, 잿더미들
아름다운 화염을 지나온
멈추지 않는 수피댄스의
회전에 접신接神되는 원심력 속으로
이제는 고꾸라질 때
나무 밑엔 여전히 기다리는 시간들
횡횡한 연착을 알려올 때
쌓인 나뭇잎들과 읽고 난 책들이 키를 맞댈 때
♧ 기적이 보이는 시간 – 이인평
늦추위에 떨다가
선뜻 지도공원엘 갔더니
그새 진달래꽃잎이 파르르 떨고 있네
능곡역 뒤편 들녘에 모낸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벼들이 언제 햇볕을 먹었는지 벌써 황금빛이네
새싹이 돋아 푸르렀던 멀리 한강 주변도
어느새 갈색이 되어 스산하네
언제 왔다 언제 갔는지
그분 손길이 스칠 때마다 만물이 새롭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절은 흘러
매 순간순간 기적을 보네
장마철에 그토록 범람했던 한강 하류도
눈 깜짝할 사이에 하얗게 얼어붙은 걸 보니
내 머릿결이 흰 것도 이내 깨닫네
♧ 가을인가 봐 – 진길자
허리 굽은 바람이 서성이는 들녘에서
김매다 지친 농부 주저앉은 하늘 아래
억새만
모시바람에
태평무를 추고 있다
폭염을 견딜 때는 고마움도 잊었는데
토실한 메뚜기는 볏잎 위에 졸고 있고
밭둑을
넘보는 대추
수줍어서 빨갛다
♧ 남대천의 시월 – 한경
한 생애를 바다에 떠돌다
목숨 바쳐 가는 길
거센 물결에
헤져 너덜거리는 살점들
치열한 귀향행렬
푸득거리는 힘찬 장송곡
품어준 어미 아비 채취를 찾아
돌아오는 연어들
남대천 물속보다 더 비릿한 세상
죽은 지 반년이 지나 발견된
어느 노인의 고독사
노인의 남대천은 어디인가
끊임없이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남대천의 시월은 장엄하다
* 시 - 『산림문학』2020 가을호(통권 39호)에서
* 사진 - 가을 꽃들. 위로부터 차례로 구절초, 솔체꽃, 이고들빼기, 산부추, 짚신나물, 당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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