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산, 멀리서 보면
깊은 수묵화요
산, 가까이서 살피면
새 짐승들의 보금자리요
산, 들앉아 읽으면
옛 고향 큰 글방 달거리요
산, 곰곰 들으면
설법 강론이요
산, 팔 베고 누워서
살살 긁어대면
가야금 산조로 높아지니
세상의 한탄이나 슬픔이나
개염부릴 일 다 잊고
되레 느긋이 자적하면서
아심여칭할 데가 바로 여기인 것을
뉘 감히 훼방 놓을 것인가.
♧ 산山 찬가
산山아 산아
푸른 산아
엎드리면 울렁거리고
안기면 복받치는 것을
산山아 산아
붉은 산아
들면 뜨거워지고
헤집으면 활활 타는 것을
산山아 산아
하얀 산아
빠지면 깊어지고
묻히면 영원한 꿈인 것을
산아 산아
미더운 산아, 끝내는
너로 말미암아
깨닫고
너로 말미암아
일어서고 너로 말미암아
쌓아올리거늘
어찌 좇아
그 화엄華嚴 살지 않을 것인가.
♧ 산山을 살고 싶다
바닷가 거닐면 바다 환상에
산에 들면 산정山情에 젖는
인생 곡절
굽이굽이 돌아 높고 멀다.
떠꺼머리 힘 좋은 한창 때
꿈같이 높은 산山
마냥 키우며 그 꽃향기 좇아 백리
봄철 산등성이 길 팍팍해도
여름내 만평 녹음 속
개살구 꿈 토실토실 살붙고,
벌떼 제맛나는 단감을 잉잉 보채듯
중년의 집념은 서둘러
가을 단풍빛 부시도록 은은하리라만
오히려 겨울 눈산에
은빛 아릿한 눈꽃같은
노년 기품, 그것 진정 고고히
만월滿月 두둥실 뜰까부다.
사철을 품은 산山
그것이 펼치는 흐름 속
한평생 꿋꿋이, 안 넘어졌고
빛바랜 사연
그 몸빛 내내 창창함이여.
그렇듯 임도 사랑도
산에 나서 산을 살면
백년 천년 무성한 숲이려니,
아으,
아름찬 나무들 들어선 산이고 싶다.
♧ 가을 편지
어느새
소슬바람 누렇다
잎사귀 오그라든
박덩쿨 심장에
귀 기울이니
힘없는 박동
으시시 떨린다
속절없이 피고 지던
긴긴 세월
뒤안길서 울며 태우다
뒤웅박
몇 초롱을 빌었던가
노을 핀
손바닥만큼 남은
내 하늘 언저리에
잔정을 식힐
그 일만 남았는가
아아, 이젠
뻐꾸기 날아와 쪼고 쪼아
그 배설물에
봄 산山 피듯이
환생還生을
거듭 빌 뿐이다.
♧ 깨달음 1
나이 육십, 기울어진
체력 탓일까 오르다 넘어졌는데
마침 나뭇가지에 받쳐
가까스로 낙상은 안 했지만
바싹 오그라들었다
산다는 것이
사람만 더불은 게 아니고
해와 달 나무 물 등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게 분명한데
그걸 이 나이에야 깨달았음에
여간 부끄러울 뿐이다
이제 나도 더 늦기 전에
누굴 떠받쳐 줄, 밀어 줄
한 몫, 지겟작대기 해내야 한다면
시 한 편 써낼 끈질긴
그 노력도 좋으리라.
* 『산림문학』2020년 가을(통권3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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