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아침 숲에 지나갔던 그 무엇 – 강방영
그것은 단지
바람이었을까,
일시에 숲을 흔들어
모든 나무들이 몸을 굽히고
모든 잎들이 뒷면을 보이며
은회색 꽃다발인 양
한꺼번에 절을 했을 때,
단숨에 그 절을 받으며
화르륵 숲을 밟고
지나서 갔던 그것은
오직 바람뿐이었을까,
바람을 타고 함께
어떤 기운이 지나서 갔기에
숲은 그를 알아차리고
나무들 온몸으로 나부끼며
빠르게 통과하는 그를 반겼기에
그 무엇이 지날 때
심해에 빛이 들 듯
거대한 숲은 스스로 쪼개져
일순간 길을 내었다가
다시 닫았던 것이 아닐까
거기에 있던 모든 존재가
맛보았던 예기치 못한 감동,
잊을 수 없고 해독 불가한 아픔.
흔적 없는 그 무엇이 사라지며
남겨 놓은 표현 못할 어떤 기억,
그것은 단지 바람 때문이었을까
♧ 가는 여름
같이 걷던 당신이 구름을 가리키면
구름은 한없이 다정하게 내게로 오고
당신이 뜨거운 열기 속에 핀
여름 꽃들을 즐거워하면
타는 꽃빛에 취한 듯
나는 사뭇 어지러워
황홀한 여름의 합창에 몸 담가
아릿아릿 감미로운 아픔을 잊고
♧ 어디일까
하늘 어느 부분에 닿으려고
나무들은 그렇게
팔 올리며 손을 늘이는가,
어느 땅 어떤 산이
날마다 불러서
꿈길 밟아 나는 떠나는가
♧ 구월 아침
바람 없는 구월 아침
고요히 줄기 위에 앉아 있는
상사화 붉은 꽃무리
일제히 날아오르려고
때를 기다리는 나비들인 듯
잠시 생각에 잠긴 바람인 듯
그들의 황금빛 꿈
차마 깨우지 못해
숨죽여 정지하는 시간
♧ ‘시인의 말’ 중에서
다시 세상에 편지를 보낸다.
사람들과 기계, 동물들과 꽃과 나무들의 세상,
생명의 노래가 생동하고, 신비의 순간이 깃들며, 아픔과 죽음의 작별로 이뤄지는 세상.
각자 자기만의 우주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곳,
작은 행성처럼 빛을 발하며 자신의 궤도에서 자전과 공전을 하다가
때로는 부딪치고 서로를 파괴하기도 하는 곳. (이하 생략)
* 시 : 강방영 시집『그 아침 숲에 지나갔던 그 무엇』(시문학 시선 576, 2018)에서
* 사진 : 몇 년 전 9월말, 천아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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