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1년 8월호의 시(1)

김창집 2021. 8. 5. 00:17

따뜻한 눈물 임채우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색한 서울역 광장

굵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늦은 출근길에 종종걸음 치는 행인들 사이로

얇은 옷의 한 노숙자가 사내를 가로 막았다

너무 추워요, 따뜻한 커피 한 잔만 사주시면

가던 길 멈추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내

자신의 점퍼를 벗어 노숙자의 꾸부정한 어깨 위로 팔을 둘러 입혀주었다

장갑을 벗어 차가운 손에 끼워주었다

지갑에서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쥐어주었다

사내는 총총히 가던 길을 갔다

포근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

*2021. 1. 18일자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짧은 기사와 눈발이 휘날리는 흐릿한 사진 한 장. 너무나도 감동적이어서 그대로 옮겨 적었다.

 

월곶 포구 조병기

 

갈매기 몇 마리 드문드문 고깃배 몇 척

갯벌에 앉아 졸고 있다

바닷물은 언제 들어올지

몇 해 전만 해도 이렇진 않았었는데

수산시장 단골집 문도 잠겨 있다

골목길 두어 바퀴 돌다가

가까스로 찾은 순댓국집에서

혼자 낮술을 마신다

세상살이가 좋아졌다는데

살기가 엄청 편리해졌다는데

갈수록 낯설기만

아직도 섬 뒤에 숨어버린 바다는

돌아올 줄을 모른다

고깃배 던져버리고 가버린 그 친구

지금 어디 가 사는지

 

고향 길 장문석

 

비가 내린다

놀이방 있던 공터 지나

빈집, 무너진 토방

말똥말똥 생쥐가 비를 긋는다

한걸음 지척

양철지붕 요란하다

작년 이맘때쯤

오쟁이 진 털보 형님

수음이 한창인 모양

막걸리 냄새 비릿하다

고샅길 돌아 파란 대문 집

채마밭에 내리는 비는

콜록콜록, 등이 굽었다

손 내밀면 뿌연 비안개

어머니 안 계시다

 

시나브로 수평선 나병춘

 

수평선

한 줄 그리고 지우고

 

해와 별무리

보태고 빼고

 

사랑, 자학의 굴레 - 최대남

 

당신이란 사람

더 많이 알고 싶어서

당신 마음 들여다보다가

나를 보았다

 

구석진 모퉁이에

발가벗고 서있는

바람난 여자

 

엷은 커튼 사이로

당신의 평온이 보였다

 

수치조차 잃어버린 수척한 그리움

 

사랑이란 말로 역겨운 비린내를

포장하지 말자

 

이미

심장을 관통하는

죽음보다 생생한 절망

 

당신을 더 알고 싶었던

혹독한 대가

당신의 마음 가장자리에서

수치를 잃고 발가벗은

나를 만난 일

 

돌아 올 길은 없는 거다

그냥 그 안에서

잃어버린 수치를 찾을 때까지

죽은 듯 살기를

 

나를 버리는 일

사랑

 

낙화 - 이화인

 

마지막 가는 길이 저리도 가벼울까?

저녁노을에 하루를 마무리하는 새의 혀처럼

열두 살 계집아이 벙그는 젖꼭지처럼

달빛을 머금고 화들짝 꽃을 피우더니

갈 길이 멀다고

아무런 걸림이 없다고

동안거 마치고 나서는 산문.

 

미역국 - 민문자

 

한우 양지 맑은 국물에 고성 쑥섬에서 온 미역을

들기름에 잘 볶아서 넣고 푹 끓인 미역국을 먹으면서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 참 맛있다, 그렇지?

, 맛있네!

내 친구가 보내준 것이라 맛있다

남자 친구가 보내준 것이라 더 맛있다

묵묵부답이다

 

지난달 한 달간 휴가를 마치고 직장 근무처

열사의 나라 아라비아로 돌아간 시인 친구

오늘도 뜨거운 모래바람 속에서

가족을 고향을 조국을 얼마나 그리워할까?

대기업 사우디 법인에서 품질과 안전 책임자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는 친구가 그립다

 

가족과 함께 고향 고성 쑥섬으로 나들이 가서

쑥을 캐고 미역을 채취해서 깨끗이 다듬고 손질해서

귀가하다가 개봉역에서 만나 건네준

애정어린 먹거리 봄쑥과 미역

쑥향 가득한 된장국과 쑥버무리 참 맛나게 먹었다오

여러 차례 아껴가며 먹었다오

 

감자꽃 - 신휘

 

밤새 감자꽃 피었습니다

 

감자꽃 피면

어머니는 밭에 가 감자꽃 땄습니다

 

사람도 너무 고우면

남의 손 타는 법이다

 

겉이 아니라

내실이 고와야 하는 법이다

 

맞선 보러 가던 누이의 파마머리 위엔

밤새 아버지의 꾸지람 내리고

 

거칠기만 했던 당신의 손도 그 바람에

잠시 출렁입니다

 

애지중지 가꿔 온 감자밭엔 그날처럼

감자꽃 수북한데

 

오늘은 내가 어머니 대신 밭둑에 서서

감자꽃 땁니다

 

한 움큼 두 움큼 꽃들 버려질 때마다

당신이 걸었을 고단했을 밭고량엔

 

풀죽은 누이의 얼굴만 파경처럼 곱게

널부러졌습니다

 

 

                                              *: 월간 우리202108398호에서

                                                  *사진 : 물이 있는 주산지와 주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