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명감옥
어쩌자고 아내는 저 속으로 들어갔을까
이러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밖에서 떠돌고 있다
아니, 아내는 밖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고
갇힌 나는 칠흑의 절벽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나가지도
아내가 들어오지도 못하는
투명한 유리감옥!
답답한 구경꾼과
안타까운 수인囚人
마주보고 있어도 천리 밖
먼먼 너의 목소리
귀를 나발喇叭처럼 열어도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 들리지 않는다.
♧ 집으로 가는 길
어쩌다 실수로 아내의 치매약을 먹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하염없이 거리를 헤맸습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걸어 다니는 일도
차를 타는 것도 다 잊은 상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허우적허우적거리다
때로는 허공을 날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길을 잃고 헤맨 아내
그 뒤를 쫓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여덟 시간 미아가 되었던 아내의 긴 세월을
하룻밤 꿈으로 대신했나 봅니다
아내의 치매약으로
다른 한세상을 구경한 내가
약도 없는 치매환자가 되어
환한 대낮에 길을 잃고 허청댑니다.
♧ 절해고도
사방이 문이라도 나갈 문 하나 없고
어디든 길이라도 갈 길이 없습니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땅 한 번 내려다 본 게 언제였던가
가리산지리산 헤매는 어둠 속
소리칠 줄 모르는 바위 하나 봅니다
천년 세월이 빚은 말씀의 경전
산 것들 눈물 나게 하지 말라는
바위 얼굴의 빛깔과 무늬를 읽으며
가는 길이 늘 꽃길일 순 없다 해도
문 열고 갈 길을 내다볼 수 있기를
오늘도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출렁이는 막막한 바다를 생각하다
시거에 바닷속으로 뛰어듭니다.
♧ 돌아가는 길
지상에 떨어져 나와
한평생 피다
돌아가는 길입니다
백목련 꽃봉오리 위
푸른 나무 그늘
가을 들녘의 논두렁 밭둑
눈 내리는 순백의 적막을 지나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앞장선 여린 아내
뒤따르는 못난 사내
집은 저 먼 곳에 있고
뚜벅뚜벅 나를 찾아가는
뭍인지 물인지도 모르고 가는
우주 산책길!
♧ 역설
“오늘 밤 잠이 들면
깨어나지 말기를,
내일 아침 해 떠도
눈을 뜨지 않기를!”
그러면서도
그러면서도,
밥 같이 먹을 사람
곁에 있으니,
한잔 술 나눌 사람
옆에 있으니,
내 몸 누일 한 평 방
내게 있으니,
천천히 산책할 길
앞에 있으니,
아낌없이 주는 자연 속
내가 있으니,
시를 낳고 안는 행복 또한
나의 것이니,
“오늘 밤에 잠들면 깊은 잠 자고
내일 아침 해 뜨면 깨어나기를!”
♧ 자식들에게
어느 날
둘이서 나란히 누워 있다고
놀라지 말 일이다
세상이 다 그렇고
세월이 그런 걸 어쩌겠느냐
말이 없다고
놀라지 마라
이미 말이 필요 없는 행성에서
할 말 다 하고 살았으니
말이 필요 없는 건 당연한 일
천지가 경련을 해도
그리워하지 마라
울지 말거라
유채꽃 산수유꽃 피면
봄은 이미 나와 함께 와 있느니.
* 시 : 홍해리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놀북, 2021)에서
* 사진 : 바다 속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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