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에 대하여
화선지에 먹물 번지는
검은 고통은 너의 진실,
가장 선명한 너의 노래이니
무통주사를 맞고 잠이 든 자여
자각 증세 없이 날마다 죽어가는 자여
너를 바라보는 숨 쉴 수 없는
고통으로 어디 별빛도 보이지 않고
죽음의 질곡 사이로 보이는 좁다란 하늘에
당신의 십자가, 가장 큰 고통으로
가장 큰 사랑의 길을 여시는 이여
풀무에 벌겋게 달구어
쇠망치로 치고 또 치는 이여
깊은 어둠 속에서 고통으로
조형하는 이여 고통을 주오
달달한 잠 깊은 곳,
죽은 심장을 독침으로 찔러주오
내 영혼 깨어 손 모아 흘리는
피로,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보다 더 진한
당신의 그림을 완성하게 하여주오.
♧ 무적
무적이 운다
오리무중 바다를 깨우며
길을 찾고 있다
사통팔달 훤한 바다에
배들은 길을 버리고
어디로 가나
이천 년이 지나도록
첨탑 끝에서 피를 흘리시는
그때 그 무적
지금도 울고 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오리무중 길 잃은 바다에
듣는 자도 없이
들을 자를 위하여
무적이 운다
♧ 이대로
이대로
감사하게 하소서
혼돈의 먹구름 뒤에서
별빛 빛나시는 이여
함바처럼 허술하고 슬퍼도
오늘은 허락하신
나의 온전한 하루
가슴이 넘치게 하소서
이대로
사랑하게 하소서
무성한 그늘 흔들리는 틈새로
가늘게 떨리는 풀잎에도
하루치의 햇살을 내리시는 이여
보일 것 없이 가난한 가슴에
당신의 눈물을 채우시고
낮은 데로 흐르게 하소서
이대로
기도하게 하소서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낱낱의 이름을 부르시는 이여
사막에서 기도의 문을 여시고
오늘은 은총의 하루
밤이 오기 전에 노를 저어
난바다를 건너가게 하여주오
♧ 나를 부르는 소리
문득 부르는 소리
누구실까?
가을 햇살 카랑카랑한 한낮
잘 익은 볼레*가 지천
졸졸 땀을 흘리며 정신이 없었다
“누구야!”
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외딴 잡목 숲속, 여기가 어딜까
캄캄한 무덤 속,
목에서 꺽-꺽- 소리가 났다
허겁지겁 높은 데로 올라가 둘러보니, 멀리
조개껍질 같은 마을과 바다가 보였다
가을 햇살 카랑카랑하고
파도가 갈매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 후, 팔십 노인이 된 지금도
내가 나에게 길을 잃을 때
아무 때 어디서나
“누구야!”
소스라쳐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익숙한 듯 생소한
나를 깨우는 그 목소리
누구실까?
---
*볼레 : 보리수. 잎이 은회색인 관목의 팥알 크기의 분홍 열매의 토속어. 가을에 자잘한 열매가 잎 사이에 많이 달리고 달콤하다.
♧ 바람의 길
붉은 사막에 달이 오르면
사막전갈은 깨어나 꼬리를 세우고
모래바람은 쉬지 않고
둔덕으로 모래를 퍼 나른다
저 끝까지 희뿌연 사막, 무엇이
얼음처럼 차갑게 면도날로 깨어나는가
창백한 달빛이 아득히 쌓이는
무한 존재의 고독에 매몰된다
출렁이며 달려오는 물결을 보라!
사막은 원래 바다였는지
이곳에서 생명이 비롯되었는지
바다에서 죽은 모든 것들의 호흡은
사막의 바람으로 모래둔덕에 쌓이고
낙타의 방울 소리가 적막한
순례자의 발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숨이 멎은 시간들이 쌓인 모래둔덕
그들은 허무의 신에게 계시를 구하는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사람의 아들,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
예수의 무한 고독을 바라본다
모래바람이 잇따라 불어오는 곳으로
* 김종호 시집 『잃어버린 신발』(푸른시인선 023, 2021)에서
* 사진 : ‘몽골 고비사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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