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서

김창집 2022. 1. 6. 01:27

산낙지를 위하여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를 먹지 말자

낡은 프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어 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토막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가을폭포

 

술을 마셨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라

가을폭포는 낙엽이 질 때마다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외로운 산새의 주검 곁에 누워 한 점 첫눈이 되기를 기다리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일어나 가을폭포로 가라

우리의 가슴속으로 흐르던 맑은 물소리는 어느덧 끊어지고

삿대질을 하며 서로의 인생을 욕하는 소리만 어지럽게 흘러가

마음이 가난한 물고기 한 마리

폭포의 물줄기를 박차고 튀어나와 푸른 하늘 위에 퍼덕이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서 몸을 던져라

곧은 폭포의 물줄기도 가늘게 굽었다 휘어진다

휘어져 굽은 폭포가 더 아름다운 밤

초승달도 가을폭포에 걸리었다

 

오병이어

 

소나기가 퍼부은 날이었다

서울역 광장에 물고기 두 마리가 떨어져 퍼득거렸다

누가 놓고 갔는지

따뜻한 보리떡 다섯 개도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낡은 비닐봉지처럼 이리저리 쓸리던 행려자들이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서울역은 그대로 밥상이 되었다

햇볕은 뜨거웠으나 물고기는 줄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보리떡도 줄지 않았다

밤이 되자 서울역 시계탑에 걸린

배고픈 초승달도 길게 줄을 서서

떡과 물고기를 얻어먹었다

유난히 달빛이 시원한 밤이라고 사람들은 떠들어대었다

그 뒤 해마다 여름이면 한 차례씩

서울역 광장에 소나가기 퍼부었다

소나기를 맞으며 밥과 국을 담은 들통을 들고

부리나케 수녀님들이 달려오면

밤 깊은 서울역 지하도 행려자 무료급식소에

밤새도록 무지개가 떠서 아름다웠다

 

서울의 성자

 

오늘도 내가 남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서울 지하철 교대역으로 가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자기만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울의 교대역에 모이는 맹인들을 찾아가 보십시오

어두침침한 지하철 정거장 통로 끝

낡은 비닐가방 속에 손을 넣고 백 원짜리 동전을 헤아리거나

혹시 누가 볼세라 역 기둥에 몸을 숨기고

물도 없이 꾸역꾸역 김밥을 먹고 있거나

손수건을 꺼내 정성들여 하모니카를 닦고 있거나

검은 색안경을 낀 채 흰 지팡이를 짚고 꾸부정하게 서서

열차를 기다리는 서울의 성자

그들을 찾아가 위안을 얻으십시오

찬 먼지바람을 맞으며 김밥을 다 먹고

차례대로 구파발행 전동차에 몸을 싣는

더듬더듬 흰 지팡이를 두드리며 하모니카를 다시 부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그대로 외로운 하모니카가 되어버리는

위안의 성자

그들을 찾아가 큰 위안을 얻으십시오.

 

마더 테레사 수녀의 미소

 

여든일곱 생신을 맞아

인도 캘커타 사랑의 선교회 본부 건물 발코니에 나와

몰려든 축하객들에게 두 손을 모으고 답례하는

마더 테레사 수녀의 웃는 사진이

동아일보 일면 머리기사로 나왔다

나는 아침밥을 먹다가 그 사진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테레사 수녀의 그 웃음이

합죽한 입가에 번진 수줍은 그 미소가

아흔에 돌아가신 내 경주할머니의 미소 같아서

평생을 첨성대 앞 채마밭에서 김을 매시던

반월성 들판에서 쑥을 캐시던

외할머니의 맑은 미소 같아서

그 사진 정성스럽게 오려놓았다

시를 쓰는 내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상처 입을 때까지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사랑은 어느 계절에나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그분의 말씀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아버지들

 

아버지는 석 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세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이다

너희들은 새 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고 때 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포장마차 우동 그릇 옆에 놓인 빈 소주병이다

너희들은 빈 소주병처럼 술집을 나와 쓰러지는 일은 없도록 하라

아버지는 다시 겨울이 와서 꺼내 입은 외투 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동전 몇 닢이다

너희들은 그 동전마저도 가져가 컵라면이라도 사먹어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고장난 벽시계다

너희들은 인생의 시계를 더 이상 고장 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동시 상영하는 삼류극장의 낡은 의자다

젊은 애인들이 나누어 씹다가 그 의자에 붙여놓은 추잉껌이다

너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깨끗한 의자가 되어주어라

아버지는 도시 인근 야산의 고사목이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를 베어 화톳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라

아버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붉은 단팥이 터져 나온 봉어빵의 눈물이다

너희들은 눈물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알아라

아버지는 지하철에 떠도는 먼지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이제 약속을 할 수 없는 약속이다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1998)에서

                                                     * 사진 : 알프스 설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