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西歸浦 招待(서귀포 초대)
바람 끝닿는 곳에
와서
하룻밤 새워 보아라
파도는 머리맡에서 울고
거북이 같은 섬들은
발밑에 엎드려 눕는데
그대 꽃물 빛
그리움 하나 창살에
젖어 흐를 것이네
간직하느니
고향 같은 친구와
잔 나눠 마시며
情(정) 푸는 인연 새겨둠이니
그대 오신 듯
바람처럼
떠나도 좋고.
♧ 버려진 섬을 위하여
어둠 속에서 섬은
바다의 이불을 끌어 당긴다
바윗덩이 알몸의 섬
정강이가 시럽다
밤새 뒤척이며 돌아눕는 품 안으로
奸巧(간교)한 웃음을 흘리는
차운 달빛 실낱들이
물살에 씻겨 내린다
화려했던 지난날의 시간
몇 개의 子音과 母音 반쪽
빛나던 이름들
이제 그 빈 껍데기들은
흐물거리는 海草에 싸여
벼랑에 부딪힌다
사랑의 말씀도
人情의 삶도
廢船(폐선)의 고동처럼
울 수 없게 되었다
五慾(오욕)의 알몸뚱이
悔恨(회한)과 울분의 눈물로 범벅된
고통의 잠 속
아픈 기억을 채울 수가 없다
파도여, 이제 그만
섬을 안아 올려라
浮標(부표)를 달아라
버려진 섬이 아님을 알 수 있도록
허공중에 펄펄 날리는
깃발이라도 매달아 놓아라
서러운 것은 버려지는 슬픔이니
外面(외면)의 눈짓을 보내지 말라
상처의 가슴을 안아라
아낌만큼 소중함을 잊지 말 일이며
베품만큼
넉넉한 情(정)을 되돌려 줄 일이다
저 荒漠(황막)한 어둠의 바다 위
버려진 섬을 위하여
사람들아,
살아온 만큼 그대들 生涯(생애)의 한 조각
베어내어 바칠 일이다
定着(정착)의 뿌리를 내리우고
버려진 아름들
하나 하나 새겨 둘 일이다.
♧ 黃昏(황혼)의 바다에 서서
서녘 햇살은
임종 앞 둔 노인네의 마른기침처럼
어둠 속을 기어든다
마지막 핏발 세우다
분산되어버리는 泡沫(포말)
수평선 끝
줄달음 쳐오던 물마루
스스로 무너지는데
두려워라, 두려운 우리들
존재의 삶
태어나고 산다는 일
우리는 늘 외로운 술래잡이
숨어도 숨어도
내보이는 삶의 흔적
죽음의 껍질을 떼어내지 못한다.
♧ 섬의 뿌리를 찾아서
바닷속 어딘가로 흐르는
푸른 섬 하나 건져 올리기 위해
사람들은 배를 띄운다
기저귀 같은 손을 흔들며
出航(출항)하는 아침
파도의 등살에 넘어지던
간밤의 꿈
날개짓을 하던 생선들은
가시그물에 걸려 파닥거린다
海草(해초)에 묻혀
거멓게 뜨는 물빛
바다는 죽어가고 있다
汚辱(오욕)의 찌꺼기에 싸여
처절한 울음을 토해내고 있다
<이어도>여,
너는 어디 있는가
나타내어라, 네 모습의 뿌리 한 줄
내보여라
茫茫大海(망망대해) 어디쯤 잠겨 있는가
솟아올라라
불끈 솟아올라
濟州(제주)의 浮標(부표)가 되어 보아라.
♧ 바람, 파도타기
미끌어질 듯 넘어지다가
일어선다 바람, 파도타기
물줄 끝 휘어잡고
물구나무서기로 세상을 본다
먼 山 구름들 발 아래로
끌어당기고
시퍼런 속살
뒤집어놓는 심보
내 모르랴,
縱橫無盡(종횡무진)
너른 바다 위를 달리고픈
네 欲望(욕망)을.
♧ 바닷게(蟹)에게
용궁 속을 기어 나왔나
자네, 너무 거만하이
그만 바로 걸어오게
여의주로 빚은 술을 먹었나
왜 그리 딴청만 부리나
정면으로 세상을 보게
자네 눈으로야
사람 사는 세상
비뚤어지고 우습더라도
그래도 우리 세상
만만치 않네
굽은 다리 쭉쭉 펴고
바로 걸어오게
등껍질의 방탄복도 벗어버리고
불만의 집게 입술 그만 다물게
우리 사는 세상 비꼬지 말게
자네 팔자야
게(蟹)팔자지.
*김용길 제4시집 『서귀포 서정별곡』 (빛남시선, 1995)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작가' 2021년 겨울호의 시(1) (0) | 2022.01.09 |
---|---|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에서(1) (0) | 2022.01.08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서 (0) | 2022.01.06 |
월간 '우리詩' 2022년 신년호 403호의 시(1) (0) | 2022.01.05 |
내일을 여는 '작가' 2021년 하반기호의 시 (0) | 2022.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