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애리샤, 시집 '치마의 원주율' 발간

김창집 2022. 1. 21. 00:06

 

시인의 말

 

누군가와 같이 부르던 노래를

혼자 불러야 할 때가 온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준

엄마, 아빠

당신들과 같이 부르던 노래를

혼자 부를 수밖에 없는 지금

 

나는 만질 수 없는 당신들의

지나간 시간을 뜯어 먹으며

당신들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나는 나 때문에 고아가 되었다

 

2021년 겨울

김애리샤

 

 

외포리 여인숙

 

구정을 막 지낸 외포리 선착장 앞바다

멀미하듯 눈보라가 어지럽게 날리면

교동 죽산포로 가는 천마2호는

다음 날 아침까지 얼어 버린 바다에 갇혀

섬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외포리 여인숙 일층 큰 방에 모여들어

떼꾼한 눈 어룽어룽 달래며

화투 점을 치기 시작하는 사람들

내일 아침에는 배가 뜨려나

모란이 그려진 화투장을 애써 찾아내

아빠 무릎 베고 누운 열 살 소녀

 

아빠가 화투장을 내리칠 때마다

들썩거리는 밤바다처럼 잠들지 못한다

가까스로 일어나 창문을 열면

엄마 냄새 같은 갯벌 냄새

얼음에 눌린 파도 소리가

소녀의 속눈썹 위로 내려앉는다

 

두께를 알 수 없는 소리로

쩡쩡 몸살을 앓던 바다 위 얼음들

밤새 구겨지던

겨울 밤하늘의 별자리들

 

내일은 배가 뜰 거야

밤새 얼음을 뒤집으며 들썩이는 파도 소리

눈보라가 외포리 여인숙으로 몰려들고

 

 

쓸쓸한 전성기

 

장롱과 벽 사이 오래된 캐리어 하나 쭈그리고 앉아 있어요

일부러 닦아내지 않은 캐리어 위 먼지들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는 당신처럼 아무 생각이 없어 보여요

 

한때 쌩쌩한 바퀴 굴리며 누군가의 여행과 함께 했을 캐리어

가슴 속에 의미 있는 자국을 새기기에 충분했을 시간을 생각해 봐요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서로의 가슴 속에 바큇자국을 남기며 지나가는

낯선 바람일지 몰라요

 

당신이 지어준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당신이 낯설어요

 

몇 개의 이빨이 빠져 끝까지 닫히지 않는 고장 난 지퍼 사이로

누렇게 빛바랜 양말 한 짝 반쯤 걸려 있고요

어디로 향하던 발이었을까요

방향 잃어버린 발자국들이 벌어진 지퍼 사이로 측은하게 새어 나와요

고장 난 지퍼는 친절해요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들까지 쉽게 쏟아내거든요

고장 난 당신 괄약근 사이로 배설물들이 아무렇게나 질질 흘러요

 

차근차근 사라져 가는 여정들 위에서 캐리어 바퀴 한 짝이

녹슨 나침반처럼 저절로 떨리고 있어요

누군가가 끌어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떠날 수 없어요

캐리어는 쓸모없이 심심해요

침대와 한 몸인 당신이 스스로 위험해질 수 없는 것처럼요

혼자서는 숨쉬기조차 멈출 권리도 없는 잔잔한 지금

당신의 가장 쓸쓸한 전성기

 

 

너는

   -할머니의 시체와 석 달을 지낸 중학생 이야기

 

너는 서 있다

다리미판 위에는 적색 담요가 깔려 있다

너는 견고하다

오른손엔 스팀다리미를

왼손엔 얼굴 하나를 들고 있다

부동자세로 서 있다

철로 만든 거대한 구두 밑창 같은 다리미로

마침내 너는 다림질을 시작한다

철판의 온도가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

스팀 버튼을 누른다

쉭쉭

스팀들이 쉭쉭거리며 네가 들고 있는

얼굴로 달려든다

드디어 얼굴이 녹아서 흘러내린다

어둑한 귀퉁이에 솜이불로 덮어놓은 할머니의 몸에서

꼬물꼬물 빠져나오던 구더기들을 무심하게 보던 눈과

열네 살이니까 흉기로 할머니를 죽여도 된다고 말했던 입과

썩어가던 할머니의 냄새를 일부러 거부하던 코와

그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던 퉁명한 볼 살이

흘러내린다

얼굴이 으깨진다 뭉개진다

살이 타는 모양은 다 뱉어내지 못하는 말들을 닮았다

다림질이 끝났지만

너는 아직 거기에 있다

흘러내린 너의 얼굴을 수습하고 있다

적색 담요 위에 녹아내린 살점들을 긁어모은다

너는 목을 구부린다

너는 붙인다

너의 목에 뭉개진 얼굴을 붙인다

이제야 너는 너다

 

 

치마의 원주율

 

오래된 살구나무 옆으로 삐져나오던

구불구불한 모퉁이 길

그 길 따라 걸을 때면 자꾸만 벗겨지던

왼쪽 발 운동화

살구나무 아래에서 치마를 넓게 펼쳐 들고

받아내고 싶었던 살구 알들

운 좋게 치마 안으로 받아들었던

몇 알의 살구들은

벌레가 먹었거나 덜 익었거나 이미

물러지기 시작한 것들

자꾸만 미끄러지는 열매들

나의 사랑을 힐끗거리며 사선으로

비껴가는 사람들

낮은 굽의 신발을 신어도

곧게 걸을 수가 없어서 나는

뾰족뾰족 무한다각의

원주율을 가지고 있어서

그 꼭짓점들 중 어떤 것들은

무디게 갈아내고 싶어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지만

캄캄한 밤들만 진열되어 있어서

조금씩 벌어질 수밖에 없는 미래들과

더 먼 미래들

나는 쓸모없는 모서리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당신의 플루토

 

행성들이 피아노 소리를 내며 몰려다닙니다

그들만의 거리

그들만의 음악으로 서로를 부딪치며, 그래서

나는 흙과 얼음으로 된 왜행성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음표가 되었습니다

당신을 믿는 믿음을 안고 추락하던 날들엔

생강을 씹는 심정으로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만

여기가 끝인가 봅니다

가장 절정일 별은 아직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과거는 짧았고 자전은 느리지만 계속되고

나는 당신의 중력에 반응하며 공전하고 있습니다

내 안의 모든 박자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그 순간

당신의 목덜미에 칼을 꽂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 때론 폭력이 된다는 걸 당신은 알까요

죽는 날만을 기다린다는 외로운 거짓말

안과 밖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없는 듯 서 있는 유리의 자세

유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안과 밖의 관계는 얼마나 쓸쓸할까

쓸쓸하게 잊지 않는 것이 사랑에 대한 가장 강력한 복수

우리는 서로의 기억을 우주적으로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비유입니다 나에겐 권리가 없으므로

그러니 마음껏 오독하셔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궤도 안에 머물지 못하는 나는

그곳에 없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공전을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범위에서 밀려난 나는 더 이상 플루토가 아닙니다

 

나는 길을 지우며 가고 있습니다, 참 멀죠

 

 

                               *김애리샤 시집 치마의 원주율(걷는사람 시인선,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