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과 영혼 – 김순남
너도 몰랐지?
순식간에 유명을 달리 할 줄을
얼마나 놀랐겠느냐
얼마나 황당했겠느냐
온전치 못한 몸에
허리 굽고 무릎 튀어나온 동네 할망들
참깨 밭으로 장터로 운전기사 자처하며
어버이날은 외로운 노인네들
꽃송이 환하게 달아주면
열 자식보다 낫다는 소리 듣고 살았다며
이웃 형네 복숭아 밭, 사과 밭에서
흔들리는 다리 곧추세우고 얻어 온
상처 난 파치들은 누가 거두어 주랴
새벽이슬 털어가며 따오던 송이버섯,
그 맛 나는 향기들은 이제
먼먼 시간 속으로 가라앉고 말겠구나
즉사라니?
어쩌자고 죽음도 아닌 주검으로 와서
황망한 골짜기로 밀어 넣는 것이냐
인명이 파리 목숨이라더니 차마
네 것인 줄 몰랐어라
개미 한 마리 벌레 한 마리, 그 어떤 미물도
함부로 때리지 않겠다.
너의 다정과 다감을 밑천 삼아
모든 살아갈 길 위에 꽃씨로 뿌려놓겠다.
♧ 미래라는 조현병 – 김신숙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미래의 목소리였다
나는 세계의 환청을 듣는
특별한 역할을 맡았는지 몰라
미래라는 가위가 있다면
새롭게 탯줄을 자르고 싶은데,
미래가 말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냉장고처럼 울겠어
그 뜻 없는 소리를 닮은
소리로 울면서 태어날 거야
시들지 않기 위해 미래는
무작정 작동한다
첫눈이 온다
죽은 아기 눈썹 자라는 소리를 듣는 첫눈
미래가 온다
손톱을 뜯어 삼킨 허공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 발톱을 자르며
첫눈이 온다
자랄게 눈썹밖에 없다는 듯
죽은 아기 기침 소리를 닮은
첫눈이 온다
♧ 바람이 놓고 갔어 – 김정순
아무데서나 웃는 건 참을 수 없어
날개가 저리도록 우주를 뱅뱅 돌아
발들이 오가는 보도블록 좁은 터에
너 인생 거는 것은 아니지
흰 구름 바라보며 가을 단풍 같은
미소 짓지 마라
너 향기 번지기 전 뭇 밭에
여지없이 짓밟혀 울 테니
어린뿌리에 눈물 심지 마라
보도블록 험한 영토에는 모질게
뿌리 내려야 해
너의 우주는 거기니까
♧ 가위손 – 김항신
소싯적엔 어머니가 단발을 해 주는데요
말 그대로 사발머리요
상상되나요
화롯불에 젓가락 달구어
파마머리 뱅뱅 말던 모습
생각나지요
그래도요
아이고 저 집 딸들은 다 고와 이
그랬다는데
어머니만큼일 때요
딸 아들 신랑 머리까지 했거든요
복고풍 머리요
상상되시지요
애들 머리는 곱다면서도
아들 머리는 요샛말로 거 뭐라 했는데 말입니다
♧ 통점 – 이윤승
뒤돌아보니
내 아득히 걸어온 길, 숟가락의 일이었네
♧ 워터코인* - 양순진
- K에게
코로나가 사방에 번진 후
사람의 발길 뜸한 극락사
가을날 수술실 그녀를 위해
해질녘 홀로 절문 들어서니
칼집처럼 날카롭게 흐르는
옹성물 소리
어떻게 알았을까
누군가 연못 속 가득
던져놓은 초록 동전들
그 사이 사이
안간힘 내며 피어난
작고 여린 흰 꽃망울들
희소식처럼 밝아진다
나는 그저
물소리
노을 소리
화음에 맞춰
부활만 되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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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서 자라는 식물 이름.
* 계간 『제주작가』 (제주작가회의, 2021년 겨울 통권75호)에서
* 사진 : 제주의 겨울을 나는 나무열매들(차례로 금식나무 후추등
백량금 자금우 사철나무 피라칸타 멀구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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