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용길 시집 '서귀포 서정별곡'의 시(3)

김창집 2022. 1. 23. 00:29

 

세상을 베고 누워 1

 

세상을 베고 누워

살아온 세월의 껍질을 벗긴다

한 겹씩 벗길 때마다

엉성하게 드러나는

悔恨(회환)의 흰 뼈

 

거머쥐고 챙겨 넣어도

빠져 달아나는 시간들

 

태생의 기쁨

느낌표로 시작된

우리의 풀씨 같은 사랑

 

이제 허물어지는

저녁 안개 속

어디서 빛나야 하는가

 

살아서 고운 영혼

욕심 없이 세상을 바르게

누울 일이다.

 

 

 

세상을 베고 누워 2

 

세상을 베고 누워

살아온 날 수를 헤아린다

허공중에 무수히 동그라미를 그리며

바람개비처럼 돌던

日常(일상)의 시간들

 

영원한 所有(소유)란 없고

이제 살아온 날 수만큼

돌아누운들

머리맡 새겨 둘 말씀

무엇이어야 하는가

 

기도의 종소리

아직 끝남이 없는데.

 

 

 

내 집 하나 만들고

 

평생 내 집 없이 살다가

이제 내 집 하나 만들고

세상 밖을 보네

 

남의 집 셋방에서 보던 세상과

내 집 안방에서 보는 세상은

왜 이리 다른지

 

이제 소()처럼 편안히 누워

되새김질 하는 세월의

뒷문을 열고

한량없는 날수를 헤아리네.

 

 

 

인형극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한 평 반짜리 무대 위에 살고 있다

 

슬플 때는 몸으로 웃고

기쁠 때는 눈으로 웃고

벙어리 입술 시키는 대로 열어

僞裝(위장)된 말씀 다 털어내어도

한 평 반

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인생

 

그 위에 눕기 위해

오랜 날

눕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인형은 바로

그 대리역이다.

 

 

 

촛불의 正體(정체)

 

어둠을 태우고 재를 날리기까지

일어서고 쓰러지는 광란의 춤을

바람은 즐거워했다

훨훨, 죽음의 꽃잎 날리는

사각의 흰 벽 저승길 밝혀내는 빛

오욕의 눈물 게워내고

심장살 녹는 슬픔 모두 도려내어

여명의 심지 한 자락

끝내 태우고 나서

그대의 정체 묘연했다.

 

 

 

山寺(산사)에서

 

늙어서 보이는 길 저리 고운데

젊디젊은 날

산마을 길만 돌았다

 

이제 山寺(산사)에 돌아와 누우니

솔바람 한 줄기

어려워라, 흔들리는 세월

보듬어 안기 어려워라

 

해거름 짧은 산사

淸虛(청허)롭자고 돌아왔는데

세상 살아갈 욕심

버리지 못한다.

 

 

                   * 김용길 시집 서귀포 서정별곡(빛남시선55, 199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