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베고 누워 1
세상을 베고 누워
살아온 세월의 껍질을 벗긴다
한 겹씩 벗길 때마다
엉성하게 드러나는
悔恨(회환)의 흰 뼈
거머쥐고 챙겨 넣어도
빠져 달아나는 시간들
태생의 기쁨
느낌표로 시작된
우리의 풀씨 같은 사랑
이제 허물어지는
저녁 안개 속
어디서 빛나야 하는가
살아서 고운 영혼
욕심 없이 세상을 바르게
누울 일이다.
♧ 세상을 베고 누워 2
세상을 베고 누워
살아온 날 수를 헤아린다
허공중에 무수히 동그라미를 그리며
바람개비처럼 돌던
日常(일상)의 시간들
영원한 所有(소유)란 없고
이제 살아온 날 수만큼
돌아누운들
머리맡 새겨 둘 말씀
무엇이어야 하는가
기도의 종소리
아직 끝남이 없는데.
♧ 내 집 하나 만들고
평생 내 집 없이 살다가
이제 내 집 하나 만들고
세상 밖을 보네
남의 집 셋방에서 보던 세상과
내 집 안방에서 보는 세상은
왜 이리 다른지
이제 소(牛)처럼 편안히 누워
되새김질 하는 세월의
뒷문을 열고
한량없는 날수를 헤아리네.
♧ 인형극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한 평 반짜리 무대 위에 살고 있다
슬플 때는 몸으로 웃고
기쁠 때는 눈으로 웃고
벙어리 입술 시키는 대로 열어
僞裝(위장)된 말씀 다 털어내어도
한 평 반
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인생
그 위에 눕기 위해
오랜 날
눕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인형은 바로
그 대리역이다.
♧ 촛불의 正體(정체)
어둠을 태우고 재를 날리기까지
일어서고 쓰러지는 광란의 춤을
바람은 즐거워했다
훨훨, 죽음의 꽃잎 날리는
사각의 흰 벽 저승길 밝혀내는 빛
오욕의 눈물 게워내고
심장살 녹는 슬픔 모두 도려내어
여명의 심지 한 자락
끝내 태우고 나서
그대의 정체 묘연했다.
♧ 山寺(산사)에서
늙어서 보이는 길 저리 고운데
젊디젊은 날
산마을 길만 돌았다
이제 山寺(산사)에 돌아와 누우니
솔바람 한 줄기
어려워라, 흔들리는 세월
보듬어 안기 어려워라
해거름 짧은 산사
淸虛(청허)롭자고 돌아왔는데
세상 살아갈 욕심
버리지 못한다.
* 김용길 시집 『서귀포 서정별곡』 (빛남시선55, 199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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