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덩굴장미처럼 아가야,
나는 헛헛한 허공을 오르는 중이었다
알 수 없는 깊이로 매몰되어가는 나의
검붉은 장미꽃 같은 자궁 속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아가야
그해 내렸던 느닷없는 봄눈은
나의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너의 세상은 향기롭게 얇아져 더는
네가 붙어 있을 수 없는 허공이었고, 그곳에서 아가야 너는
태어날 수 없는 심장을 부여잡고 어둡게 떨고 있었겠지
그러다 그만 허공을 디딘 붉고 동그란 아가야
너의 헛발질에 산독이 올라 나는 시들어갔다
그해 봄눈은 포근하게 추웠고 살아가는 일은 살얼음이어서
너를 감싸주기엔 쉽게 녹아버리고 말았단다 아가야,
나는 차라리 딱딱하게 언 북극으로 가고 싶었단다
그러나 아가야,
그때 나는 가시들로 내성을 키우고 붉게 꽃피어나길 기도했단다
떨어져 나가야만 하는 꽃잎들과 살기 위한 절망들로 엉켜들었단다
욕망과 허술한 열정과 쉽게 녹아버린 믿음으로
무덤 같은 허공으로 기어 올라갔단다
허공처럼 향기로운 무덤이 또 있을까
때론 밀어내는 것도 사랑이라 말한 사랑이 바람에 날려 어지러울 때
하늘로 올라간 아가야, 너는 그곳에서 성운으로 다시 태어나겠지
흩어진 너를 하나하나 불러 모아 붉은 빛 장미성운으로 태어나겠지
허술하게 얽혀 있는 우리들의 가지를 끊어내면서
덩굴장미처럼 아가야,
♧ 나는 엉망입니다
나는 엉망입니다
종이를 구기면 채송화가
피어납니다
당신의 눈동자엔
금이 가 있습니다
꽃이 핀다는 건
당신이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채송화 같은 당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거두고 있는 지금은
영원입니다
그 마음을
붙잡고 있는 나는
엉망입니다
♧ 김매는 사람
그는 평생
김매는 사람이었다
배추밭에 감자밭에 어린 수수밭에
자라나는 잡초들을 뽑아내느라
고개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모낸 논에, 살아보겠다고
자라나는 피들을 뽑아내느라
그의 발은 언제나 부르터 있었다
그의 가슴과 등은 그대로
밭이고 논이었다
잡초들을 뽑아내며 피를 뽑아내며
그는 마음속 그리움들도 뽑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김을 매고 또 매도
사라지지 않는 풀이 있었다
아무리 밟아도
아무리 뽑아도
죽지 않는 고향
아버지는 평생
북쪽에 두고 온
마음밭 김을 매셨다
♧ 분갈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가지들
자꾸만 작아져 가던
당신의 팔과 다리를 닮았다
분갈이하기 위해 나무를 뽑았다
둥근 화분 모양으로 가늘게
갇혀 있는 뿌리들
어떤 화분으로도 옮겨 심지 못했다
당신을 풍장하고 돌아오던 날처럼 기도했다
바람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라고
갇혀 지내지 말라고
♧ 찢어진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중학교 이학년 때
우린 같은 반이었지
시험 기간에 마당에 그 애 얼굴 그려놓고
시험 망쳐라 시험 망쳐라 막대기로 마구 낙서를 했어
내가 그 애보다 시험을 잘 보고 싶었거든
시험 끝나는 날 그 애가 전해준 편지
난 네가 정말 좋아
덜컹거리는 하교 버스 안
내 심장은 버스보다 더 덜컹거려 너무 창피했지
집에 와서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본 그 편지
답장을 쓰고 싶어 편지를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지
결국 아궁이 속에서 산산조각 난 그 편질 발견했어
엄마 몰래 까만 재 속에서 편지 조각들을 골라내
테이프로 이어 붙였어
스무 살이 지나고 마흔 살도 지나고 쉰 살도 지나고
그동안 난 얼마나 많은 편지들을 이어 붙였을까
내가 찢어버린 사람들의 마음
나를 찢어버리고 사라진 사람들의 마음
찢어진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되었어
이쯤의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된 거야
어름은 항상 찢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무리 잘 이어 붙여도 붙인 자국은 남게 된다는 걸
♧ 분꽃
앞뜰 화단 가득 분꽃이 피었네
칠월이라 아직 환한 저녁 무렵
소심한 나팔처럼 하나씩 분꽃이 피어나면
엄마는 저녁을 지었네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엄마의 얼굴은
분꽃처럼 진분홍색이었네
별이 뜨지 않는 밤
분꽃들은 등이 되어 앞마당을 밝혔네
올망졸망 모여앉아 뜨지 않는 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네
그때까지 집에 오지 않은 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분꽃 등을 본 적이 있었을까
아침이면 밤하늘이 문을 닫듯
분꽃들도 얼굴을 감췄네
밤새 작은 바람 소리에도 엄마는
자주 뒤척였고
엄마의 아침도 분꽃처럼 닫혔네
평생을 분꽃처럼 살았네
분꽃 씨앗처럼 까맣게 쭈글쭈글해지던 엄마
화장터 화구에 들어가기 전 곱게 분칠했네
분꽃 씨앗 한데 모아 터뜨리고 하얀 가루를 받아내어
곱게 분칠했네
죽어서 제일 예쁜 엄마 얼굴
진분홍색 한지로 분꽃 꽃다발 만들어
관 속에 누워 있는 엄마 발치에 놓았네
* 김애리샤 시집 『치마의 원주율』 (걷는사람 시인선 57,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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