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스크맨
어둠이 도시에 내리면
하얀 마스크는 거리로 나선다
얼굴을 가린 마스크 위로
안광이 번뜩인다
바이러스가 점령한 세상
감시의 눈을 피해 가며
어렵사리 동지를 모았다
보이지 않는 빌런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공격들
안전지대를 찾아 기척을 숨기고
공간 사이사이를 이동한다
DARKS로 불리는 으슥한 골목 주점
둘러앉은 네 명의 마스크맨
잔을 채우고 마스크를 벗는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는다
♧ 홀로 하루를 먹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꺼내 먹는 바나나 우유 맛
밤마다 끓여 먹는 라면 맛
홀로 창문에 매달리는
세상과 격리된 수감자
격리를 이겨내는 건
상자 모양 원룸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일
무수한 광고지만 불려 다니는
한산한 당산동 거리
입과 코가 없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도망친다
바이러스가 엉겨 붙을라
흩어지는 사람들
어제가 복사되어 붙여진 오늘
특별한 것을 찾는데
손님 끊긴 문 앞에 앉은 식당 아저씨
올려다보며 짓는 눈웃음
마스크 속 가려진 속상함이 보인다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무렵
하늘에 노란 눈 하나 떠 있다
다크서클처럼 갈린 노을
구름 눈썹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 기묘한 칼잡이
번쩍이는 칼날이 춤을 춘다
벌어지는 살들 사이로
붉은 피가 흐른다
고귀한 손으로 불어넣는 공력이
칼날에 가닿으면
사인검* 보다 날카로운 칼이
살아 움직이며 생명의 빛을 뿌린다
그는 산 것이 아닌
죽은 것만 가르는 칼잡이
엄숙하고 능숙한 칼질에
죽은 것들이 살아난다
차가운 살기가 공간을 지배하고
절대적 위엄에 짓눌린 주민들이
돌이 되어 굳어 간다
비명처럼 종소리가 울린다
앞가슴을 가린 가죽갑옷을 펴고
그는 칼을 들고 공력을 모아
사자후의 목소리로
세일을 외친다
---
*김유신 장군이 썼다는 전설의 명검
♧ 광치기해변의 아이들
이른 저녁
노는 아이들이 모래를 파다가
오래된 뼛조각을 주워
신기하게 돌려보고 있다
호기심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칠십여 년 전에 묻힌
우리 할아버지의 유해遺骸일까
바닷바람에 해변을 거니는
할아버지의 체향을 느낀다
그의 혈血로 이루어진 검붉은 해변
그의 골분骨粉으로 만들어진 모래
세월에 녹아 한줌씩
바다로 퍼져나간다
시린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리자 쉬이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골분을 파헤치며
성을 쌓는다
♧ 명도*
말 못하는 어린 아이가
다랑쉬 마을 터에 앉아 있네
주춧돌처럼 생긴 바위에 앉아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네
아이의 집은 어딜까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대나무밭
사라진 초가들 사이
곧게 자란 대나무들만이
집터의 흔적을 남기고 있네
아이의 집은 어딜까
물어도 말 못하는
아이의 집은 어딜까
대나무밭 사이를 걸으며 묻는데
대나무들이 말을 하네
말 못하는 아이 대신
쉬쉬하며 말을 하네
감춰진 이야기들
대나무들이 쉬쉬하네
아이의 집을 찾지 못한 채
다랑쉬굴을 보고 돌아오는데
아이가 있던 자리엔
녹슨 칼자루만이 놓여 있네
---
*아이가 죽어서 된 귀신
* 오광석 시집 『이상한 나라의 샐러리』 (걷는사람 시인선 54,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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