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곤春困 - 조병기
꽃내가 몰려와 눈 뜰 수 없어
온 삭신이 저여 온다
가려운 델 긁다가 시진한 한때
곤충들도 촉각이 마비되어 허둥댄다
꽃샘바람 이 무슨 난시냐
관자놀이가 욱신거려 뜰 가에 서면
생명들이 삐죽삐죽 흙을 뚫는다
앞산도 어슬렁어슬렁 내려오고 있었다
이 봄엔 취해 살겠네 취해 살겠네
♧ 그림자 – 허형만
초록빛 열매가
먹빛으로 익어가는 사이에도
여전히 초록빛으로 달려 있는
산딸기 그림자
어느 산골짜기 어느
강물 곁을 지나
한없는 그리움의 흔적으로
나를 돌아보게 하나
산딸기 그림자처럼 주렁주렁
초록의 굴레 안에서
익을 줄 모르는
한 생애는 그림자
♧ 용머리 해안에서
제주도 용머리 해안의 간이천막 안
늙은 해녀들이 좌판을 벌이고 있다
해삼 멍게 등속과 소주 한 병을 시킨다
그런데 시끄럽다
가뜩이나 익숙지 않은 제주 사투리에
목청은 용머리 해안의 파도소리를 넘는다
이건 심하다 싶어 우스갯소리로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소이다,
했더니만
미안허우다, 미안허우다
모두들 어둡게 돌아앉는다
몰랐다
물질이 다름 아닌 수압과의 싸움이란 걸
비바리 때부터 시작된 수십 년의 물질이
그네들의 고막에, 그 나이테에
시나브로 구멍을 숭숭 뚫어 놓았다는 걸
그래서 잔챙이는 말고 큰 소리만 걸러진다는 걸
그 아픈 삶의 이력을 잘 몰랐다
올해로 아흔 살인 아버지
당신의 아득한 청력 또한
세월의 수압과 싸워 온
구멍 난 나이테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걸
♧ 겨울나무 - 김성중
비 개인 뒤 매서운 바람
잎을 죄다 떨구고
너는 홀가분하다
옷을 벗어버렸으니
이제 너는 고요히 명상에 잠기리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가지 사이로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바람이 불면 너는
허리를 곧추세운다
바람을 맞아 싸우려는 게 아니다
정신을 맑히려는 것이다
너는 옷을 다 벗어버리고도
당당하게 바람을 맞는다
벌거벗은 너를 본다
너는 해마다 옷을 벗으며
나이테를 더하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한겨울을 가는 숨만 쉬면서
뜨거운 불을 안고서
겨울잠을 잔다
♧ 참회록 – 김미외
퇴색한 앨범 속 사진에
젊음이 빛나게 웃고 있다
부끄럽다
지금 이 순간
내 시간의 강은 가을로 흐르고
지금 이 순간
이미 지나온 봄, 여름 강의
잊어버린 시간으로부터
당신을 사랑한 나
나를 사랑한 당신의
찾아온다
겨울 강의 먼 훗날이
지금 이 순간으로 흐르면
당신을 사랑한 나
나를 사랑한 당신을
모두 잊을 텐데
시간이 멈춘 사진들을
버린다
버리고 갈 것들을
남기지 말아야지
♧ 나오리 녹차꽃 - 민문자
코로나 유행병으로 발걸음이 자유롭지 못한
2021년도 해 저물어가는 12월 첫째 토요일에
‘갈치 꼬랑지’처럼 좁고 길게 자리 잡은 태안반도 땅끝 마을
‘너무 멀어 가다가다 만다’는 만대마을
그 마을 새 이름 나포리를 연상케 하는 나오리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도자기 표면을
자연스럽게 갈라지게 하는 트임기법을 만들어
유럽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 귀국했다는
양승호 도예가의 가마터가 있는 학습장에서
윤곤강 시인의 시를 비롯한 시낭송회를 열었다
금방 꺾어온 나오리 녹차꽃을 바라보며
주인이 제공하는 생녹차를 마셨다
신비로운 도자기 꽃병의 배경 탓일까?
그 트임기법으로 생산된 찻잔의 은근한 매력에
찻잔 네 개를 상당한 금액에 구입하기도 하였지
동지섣달에 이렇게 예쁜 꽃이 피어나다니
나오리 녹차꽃의 매력에 그저 무아지경에 빠졌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이기고 피어나서일까?
꽃병에 새겨진 나비형상이 어우러져서일까?
누군가 와서 체험한 작품이라는데 매력 만점이네
□ 월간 『우리詩』 2022년 2월호(통권 404호)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인시집 '포엠만경' 10호의 시(2) (0) | 2022.02.13 |
---|---|
강덕환 시집 '섬에선 바람도 벗이다'의 시(4) (0) | 2022.02.12 |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의 시 (0) | 2022.02.10 |
오광석 시집 '이상한 나라의 샐러리'의 시(4) (0) | 2022.02.09 |
김애리샤 시집 '치마의 원주율'의 시(3) (0) | 2022.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