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마 줄기를 당기며
비 오는 날 할머니
빈 밭
캐다 남겨둔 고구마 줄기를 당겨본다
아직도 남아 있구나
따스한 체온, 할머니 발 담갔던 자리
줄기에 줄기를 더해
캐내고 캐내도 더 살아난다
할머니 혼잣말로 마음 다스렸지
모든 길이 두렵구나
고구마 줄기처럼 당기면 당길수록 늘어나는 아픔
잡아 휘어잡으면 달아나지 못하는
절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거지
그래,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왕고구마 아니더라도 슬며시 잡아당겨 본 줄기
흙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
방울방울 빛나는 그 알갱이
알 듯 모를 듯
말할 듯 안할 듯 남기고 떠난 할머니
그 미소처럼 달려 있다 (1995)
♧ 호미로 그 눈물을 누르고 싶다
할머니는 가끔 눈치 채지 못하도록
깊은 어둠 부서질세라 부스럭대며
호미하나 쥐고 농사도 안 보이는
울 안 밭담으로 들어 서셨다
그리곤 익숙하게 등을 구부리셨다
북으로 검은 물살 꺾일 때
할머니는 서북으로 고개 돌린 억새숲 가시낭숲
자드락길 사이로 훠이 구비 돌아
돌아오셨다 그 이유를
나는 알 길이 없다
살다보면 살 수 있다는 말씀의 깊이를
나는 알 길이 없었다
할머니 타 넘으셨던 검은 밭담 홀로 들어섰다
그 안으로 내 청년에 이미 떠난
할머니의 꽈리 같은 눈 따라와 멈춰 섰다
언뜻 아직 언 땅 위로
떨어져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보았다
가벼운 몸이 무겁게 내려앉는 흙살갗으로
스며들수록 깊숙해지는 슬픔을 보았다
나는 차마 할머니처럼 호미를 들이 밀 수가 없다
비록 닿을 수는 없겠지만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홀로 파내고 꾸욱 누르고 있던 할머니 눈물
일으켜 껴안고 싶다
현무암처럼 견고한 눈물을 (1995)
♧ 돌밭
어느 생이 먼저 한 어둠을 앞서서 갔나
쓰린 기억의 눈발들이 갈래갈래 부서지며
빈 벌의 어둠을 누른다
화산재 뜬땅 밟듯
시퍼렇게 질린 양배추이 미간 사이로
촘촘히 살 뚫고 들어가는
견딜 수 없이 콕콕 찌르는 별
젖은 몸, 헐한 마음의 저녁까지 따라와
험한 세상, 둘둘 휘말고 있구나
네 생의 비린 길녘도 안다는 양
파르스름한 상처, 길 트는 호랑가시나무
엉킨 삶 하나씩 풀어내고 있구나
원하지 않아도 살가운 것들
잃어가는 대지 위로
별무리 들나방처럼 달라붙어
어머니 심장 에인 눈발처럼
덤불 흙밭 굳은 삶을 하얗게 에우고 있다 (1996)
♧ 감자를 먹는 아이들
살그락 산박하향 타고 올라서 내려간 감자밭
햇감자 하얀 꽃이 쏙 올랐다
또랑진 눈 뜨고 몸 푸는 어린 것
평화가 보었다
아침 신문엔 감자를 먹는 북쪽 아이들
눈망울로 가득 찼다
퀭한 눈, 볼록 배, 터진 발가락
맨발의 꽃제비들이란다
빈 그릇 앞에 놓고
아이들이 감자를 먹는구나
감자가 아이들을 먹는구나
우리가 먹는 건 감자가 아니다
우리가 먹는 건 식량이 아니다
거기 아이들이 먹는 건 목숨이다
감자밭 가녘으로 뉘엿뉘엿 죽어서도
감자 꿈을 꾸는 아이들이 있다 (1996)
♧ 어느 잠녀의 일기
매운 가문의 내력을 알겠느냐
대나무 숲 수직으로 솟은 심지로
당당히 버텨온 네 어미
속으로 돌고 돌다보면 터질 것 같은
가슴엣 게 뭔지 알겠느냐
네 삶이 빛나는 것이더면
그 삶을 다스려온 내 위태한 삶도 기다려라
칡덩굴 휘휘 감아 올린 돌흙밭 일어
갈매물 저녁답 지나 산전 깊숙이 빠져 나오면
소금기 절여진 치마말기
말릴 수 있겠느냐
차마 가문의 역사로 풀어 헤치면
양이 차지 않다함도 알겠느냐
가슴 저민 영욕도 한갓 결박당한 역사로 남아
있는 법
버릴 수 없는 잉어등 꿈
이 물길 저 물길 돌아오다 보면 보이겠거니
고통이 쌓인 바닷돌처럼 더 검고 견고해지리니
어둑 자갈밭 걸어서 허리 굽힌 집 떠난 꿈
아직도 키우고 있구나
누구든 어미만큼 잠수해 보았느냐
나는 더 무엇을 만나러
신새벽 난바다에 등 하나 밝혀
사무치는 생애 한 척 띄워야 하느냐 (1985)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 (당그래, 200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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