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의 시(2)

김창집 2022. 2. 16. 08:55

 

고구마 줄기를 당기며

 

비 오는 날 할머니

빈 밭

캐다 남겨둔 고구마 줄기를 당겨본다

아직도 남아 있구나

따스한 체온, 할머니 발 담갔던 자리

줄기에 줄기를 더해

캐내고 캐내도 더 살아난다

 

할머니 혼잣말로 마음 다스렸지

모든 길이 두렵구나

고구마 줄기처럼 당기면 당길수록 늘어나는 아픔

잡아 휘어잡으면 달아나지 못하는

절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거지

그래,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왕고구마 아니더라도 슬며시 잡아당겨 본 줄기

흙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

방울방울 빛나는 그 알갱이

알 듯 모를 듯

말할 듯 안할 듯 남기고 떠난 할머니

그 미소처럼 달려 있다 (1995)

 

 

호미로 그 눈물을 누르고 싶다

 

할머니는 가끔 눈치 채지 못하도록

깊은 어둠 부서질세라 부스럭대며

호미하나 쥐고 농사도 안 보이는

울 안 밭담으로 들어 서셨다

그리곤 익숙하게 등을 구부리셨다

북으로 검은 물살 꺾일 때

할머니는 서북으로 고개 돌린 억새숲 가시낭숲

자드락길 사이로 훠이 구비 돌아

돌아오셨다 그 이유를

나는 알 길이 없다

살다보면 살 수 있다는 말씀의 깊이를

나는 알 길이 없었다

할머니 타 넘으셨던 검은 밭담 홀로 들어섰다

그 안으로 내 청년에 이미 떠난

할머니의 꽈리 같은 눈 따라와 멈춰 섰다

언뜻 아직 언 땅 위로

떨어져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보았다

가벼운 몸이 무겁게 내려앉는 흙살갗으로

스며들수록 깊숙해지는 슬픔을 보았다

나는 차마 할머니처럼 호미를 들이 밀 수가 없다

비록 닿을 수는 없겠지만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홀로 파내고 꾸욱 누르고 있던 할머니 눈물

일으켜 껴안고 싶다

현무암처럼 견고한 눈물을 (1995)

 

 

돌밭

 

어느 생이 먼저 한 어둠을 앞서서 갔나

쓰린 기억의 눈발들이 갈래갈래 부서지며

빈 벌의 어둠을 누른다

화산재 뜬땅 밟듯

시퍼렇게 질린 양배추이 미간 사이로

촘촘히 살 뚫고 들어가는

견딜 수 없이 콕콕 찌르는 별

젖은 몸, 헐한 마음의 저녁까지 따라와

험한 세상, 둘둘 휘말고 있구나

네 생의 비린 길녘도 안다는 양

파르스름한 상처, 길 트는 호랑가시나무

엉킨 삶 하나씩 풀어내고 있구나

원하지 않아도 살가운 것들

잃어가는 대지 위로

별무리 들나방처럼 달라붙어

어머니 심장 에인 눈발처럼

덤불 흙밭 굳은 삶을 하얗게 에우고 있다 (1996)

 

 

감자를 먹는 아이들

 

살그락 산박하향 타고 올라서 내려간 감자밭

햇감자 하얀 꽃이 쏙 올랐다

또랑진 눈 뜨고 몸 푸는 어린 것

평화가 보었다

 

아침 신문엔 감자를 먹는 북쪽 아이들

눈망울로 가득 찼다

퀭한 눈, 볼록 배, 터진 발가락

맨발의 꽃제비들이란다

빈 그릇 앞에 놓고

 

아이들이 감자를 먹는구나

감자가 아이들을 먹는구나

우리가 먹는 건 감자가 아니다

우리가 먹는 건 식량이 아니다

거기 아이들이 먹는 건 목숨이다

감자밭 가녘으로 뉘엿뉘엿 죽어서도

감자 꿈을 꾸는 아이들이 있다 (1996)

 

 

어느 잠녀의 일기

 

매운 가문의 내력을 알겠느냐

대나무 숲 수직으로 솟은 심지로

당당히 버텨온 네 어미

속으로 돌고 돌다보면 터질 것 같은

가슴엣 게 뭔지 알겠느냐

네 삶이 빛나는 것이더면

그 삶을 다스려온 내 위태한 삶도 기다려라

칡덩굴 휘휘 감아 올린 돌흙밭 일어

갈매물 저녁답 지나 산전 깊숙이 빠져 나오면

소금기 절여진 치마말기

말릴 수 있겠느냐

차마 가문의 역사로 풀어 헤치면

양이 차지 않다함도 알겠느냐

가슴 저민 영욕도 한갓 결박당한 역사로 남아

있는 법

버릴 수 없는 잉어등 꿈

이 물길 저 물길 돌아오다 보면 보이겠거니

고통이 쌓인 바닷돌처럼 더 검고 견고해지리니

어둑 자갈밭 걸어서 허리 굽힌 집 떠난 꿈

아직도 키우고 있구나

누구든 어미만큼 잠수해 보았느냐

나는 더 무엇을 만나러

신새벽 난바다에 등 하나 밝혀

사무치는 생애 한 척 띄워야 하느냐 (1985)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당그래, 200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