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월호의 시(2)

김창집 2022. 2. 14. 07:55

 

황성 옛터 - 천지경

 

술 취한 아버지가 또 노래를 부른다

아는 노래가 저것뿐인가

! 정말 지겨운 황성 옛터

성은 허물어졌고 월색만 고요한

사흘이 멀다 하고 폐허에 설운 회포를

말해 주던 황성 옛터

당신이 더 허물어졌잖아요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가 주사로 불러대던 황성 옛터

비음을 넣어가며 부르던 황성 옛터

노름방서 돌아와 부르던 황성 옛터

아비가 밉지훌쩍이며 자책하던 황성 옛터

진저리치며 증오했던 황성 옛터

언제쯤 죽을 것인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던 황성 옛터

 

가요무대서 누군가 부르는 황성 옛터

코끝이 찡해지는 황성 옛터

북한에 있어 가 볼 수도 없다는 황성 옛터

늦가을 비 오던 날 아비를 묻어서

비가 오면 더 가슴을 후비는 황성 옛터

이제는 밉지 않고 애절해진 황성 옛터

 

 

헤아리다 - 성숙옥

 

햇잎의 혀에 적신 물의 숨결이

작설차 향기로 맺히는 시간

 

푸른 혈맥을 웅크린 산을 지나온 빛이

창에 부려진다

곡선을 모르는 빛을 편애하는 것들은 한 방향만 보게 되는 법

나는 끈끈하게 자신을 길들이는 풀을 생각하며

봄마다 직선으로 뻗은 길을 작심하였지만

그 꿈은 안개 속일 때가 많아

 

편향된 습관과 오독된 통로로 굽은 내 잎맥 있다

 

창틀을 넘어온 봄을 맞아

어떤 향기를 피워낼지

막막함이 새잎과 같이 돋는 내게

수억 년을 견딘 사하라 사막이 뿌옇게 불어와

근심 없이 지고 피는 활엽수,

겨우내

망울을 만드는 목련 나무의 꽃눈을 헤아려 보라 한다

 

 

염소 울음 독해법 - 김은호

 

비쩍 마른 염소에게

겨울 햇볕 한 움큼 물려준다

눈 덮인 산봉우리 바라보라고 말해준다

 

염소 눈에 눈 맞추면 나는 금세 저녁이 된다

그 내력 들여다보면 초저녁별 반짝인다

 

염소는 누구를 위하여 울까

아기 우는 소리 같은 너의 발성으로는

차디찬 바람의 손길을 멈출 수가 없다

노을이 잠시 여린 손을 얹었다 갈 뿐

 

염소 울음 한 사발

당신에게 건네고 싶은 저녁

함께 울다 함께 웃다 따뜻해지고 싶은

 

당신은 더 멀리 가고

나는 염소 울음에 반주를 맞춰준다

 

어미 잃은 새끼처럼 서러워지는 노래

 

누가 저 소심한 울음을

밤하늘 염소자리에 고삐 매어 빛나게 할까

 

 

새벽 - 김혜천

 

태양이 어둠을 기어오른다

 

빛이 퍼진다

 

소나무 숲이 열린다

 

동해가 열린다

 

마음의 공간도 넓어진다

 

어린아이 마음으로 출렁인다

 

선물같은 백지를 독대한 자여

 

너머의 너머로

 

우주의 공간 속으로 마음껏 팽창하시라

 

 

빨래방 - 장동빈

 

수십 대의 세탁기들이 돌아간다

주변과 상관없이

 

김칫국 묻은 셔츠

담배 냄새 찌든 점퍼

땀 냄새 나는 운동복

세상의 무게를 안고 온종일 걸었을 양말

하루를 살아낸 흔적들이 돌아간다

 

살아오느라 때 묻은 마음도

어찌하고 싶다

잘 살아왔지만

지쳐있는 마음을

한 번쯤 세탁기에 세제를 넣고

빨아 쓰고 싶다

 

건조기로 옮겨진

깨끗해지고 향기를 입은 빨래들

뽀송해지기 위해 뒤엉켜 돈다

혼자가 아니어서 더 따듯해진다

 

따스해진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개며 마음도 접으며

빨래방을 나갈 때는

혼자가 되고 싶었던 마음이

같이 살아갈 준비를 한다

 

 

마력의 기원 - 이중동

 

초록이 사라진 사막에 햇볕만이 숨을 몰아쉬고 있다

갈기 듬성한 말 한 마리 걸음을 재촉하는데

윤기를 잃은 발굽은 힘을 쓰지 못한다

야생에 길든 짐승은 편자가 없어도 길을 나서야 하고

체념에 젖은 발걸음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수레에 실린 수심은 일생을 비워도 무겁고

쟁여 맨 동아줄은 종일토록 조여도 헐겁다

광야를 넘어온 모래바람이 발목을 붙잡고

거친 숨소리는 문풍지를 파고드는 바람 소리 같다

 

사막에 발걸음을 내디딘 지 몇 해,

야성을 잃고 마력魔力으로 살아온 한 생애

모퉁이를 돌아온 바람이 푸른 소식을 전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초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어둠은 발목을 묶고 길은 쉽게 허락하지 않는데

마력을 잃은 길짐승이 가야 할 곳 어디인가

언덕을 넘어가면 서걱거리는 눈들의 안식처

동여맨 몇 근의 폐지와 힘을 잃은 발목 사이에서

지친 발걸음만이 그의 마력을 기억하고 있다

 

 

                             * 월간 우리2월호(통권404)에서

                                * 사진 : 올해, 늦게 핀 복수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