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2년 2월호의 시(3)

김창집 2022. 2. 19. 00:42

 

꽃으로 보여라 - 민문자

 

하늘은 하양 높고 푸른 동짓달 만추에

강남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마님의 초대로

셋이서 그동안 나누지 못하던 이야기꽃을 피웠네

그리고 달콤한 초콜릿 선물까지 받아들고 귀가 중인데

 

엊그제 제4시집을 발간해서 보내준

시인의 전화를 받았네

이 할미꽃을 만나고 싶다네

열사의 나라에서 달러를 버느라 애쓰는 사나이

 

개봉역 아래 조촐한 찻집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지, 참 이상한 일이야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자꾸만 주고 싶은 모양이야

봄에는 고향에 가서 쑥과 미역을 캐다 주더니

 

오늘은 사우디 명산물을 이것저것 가져왔네

나는 그에게 줄 것이 없어서

강남에서 선물 받은 초콜릿을 주었지

이 할미꽃이 아직도 아름다운가요?

 

그저 남의 눈에 꽃으로 보여라 잎으로 보여라 하시던

어머님의 음덕을 입어서인지

이 사람 저 사람의 사랑을 많이 먹고 살아가네

내일도 초대를 받은 나는 꼬부라진 할미꽃

 

 

찬란한 이별 - 임승진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를 보며 물어봅니다

 

세월이 어찌 그리 야속하냐고

가을이 어찌 그리 서글프냐고

 

바닥으로 떨어진

알록달록 단풍잎이 말합니다

 

푸르른 시절이 없었더라면

찬란한 가을은 오지 않았을 것이고

서러운 고난이 없었더라면

진정한 기쁨도 얻지 못했을 거라고

 

의연히 떠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멋진 삶이려니

그렇게 세상은

지속되고 존재하고 있다고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누구의 횡포도 아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누릴 수 있는 자의 특권이기에

묻지 않아서 모르는 게 아니고

듣지 못해서 모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짧은 동행 천지경

 

몇 집 건너 사는 동네 아지매와

걷는 방향이 같은 날

팔십이 다 된 그녀와

육십을 앞둔 내가

도란도란 나란히 길을 간다

새악시 참 얼굴도 곱소

눈이 어두우셔서 낼모레 육십인 나를

예쁘다 예쁘다 하신다

0자 다리로 어거정어거정 걷는 그녀

허리 통증과 다리 저림에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다 한다

같이 가는 십여 분의 시간 동안

일생의 고달픔을 풀어놓으시며

당신처럼 되지 말고

몸 아껴가며 살라고 한다

 

이윽고 목적지 도달

그녀는 한방병원으로

나는 장례식장 조리실로

 

또 하루를 견디러 간다

 

 

여리여리한 - 성숙옥

 

TV 속 동물 다큐멘터리

굶주린 새끼원숭이 앞에 먹을 것과 담요를 놓았다

원숭이는 엄마 품 같은 담요로 간다

낯선 조명과 사람들 이곳은 어디일까

힘이 센 감각은 또 다른 감각을 멈추게 하듯

경험 못 한 공포가 허기를 누르고 있다

긴장한 방이

웅크린다

밀림의 퉁퉁 불은 젖이

보송보송한 털 밑

핏물로 고이는 데

카메라의 눈 속으로

여리여리한 숨만 드나든다

 

 

사랑, 그거 별거 아니더라 우정연

 

온몸으로 껴안아야 사랑인 줄 알았다

하나뿐인 목숨이라도 바쳐야 사랑인 줄 알았다

 

티 없는 가을 하늘 아래 한 점,

흐르는 구름만 보아도 눈이 짓무른다

 

저기 저, 식영정息影亭* 뜰 앞에

오백 년간 외길로 걸어왔다는 푸른 소나무 한 그루

꼬옥 안아주고 싶다

 

해 기우는 가을이 되면

그립고, 보고 싶은 게 많아 눈물이 흔해진다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울컥거린다

 

사랑은

틈새마다 숨어 반짝, 빛을 발한다

그 빛남으로 어디든 닿지 않은 곳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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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영정 : 전남 담양에 있는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정자.

 

 

복수초 - 김혜천

 

얼음장 밑에서 하늘 열린다

 

겨우내 언 땅 뚫고

 

움트는 황금빛 꿈이여

 

갈망도 깊으면 독이 되는가

 

독기를 내뿜어 눈을 녹이고

 

샛노랗게 샛노랗게 피는 꽃이여

 

그리움 하나 움켜잡고

 

송이처럼 돋아나

 

얼음 위의 몸을 푸는 모진 목숨이여

 

 

                     * 월간 우리20222월호(통권 40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