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박람회 – 강상기
고양시 호수공원 앞 꽃 박람회장에 가서 보았다
고유의 빛을 발하며 한 동아리로 자리한 것을,
세계의 꽃들이 다 함께 한 자리에 모여
화합과 평화와 아름다움을 이룬 것을,
저 꽃에 시선을 빼앗겨 부러워 경탄하면서
한 동아리로 자리하지 못하는 우리가
꽃이 진한 빛깔과 향기보다 더욱 시리다
♧ 고향 – 김광원
제대하고 오면서 부르려고
입대 전, ‘역마차’ 곡에
가사도 붙이고
단양팔경 돌면서 흥얼거렸는데
평생을 흘려보내고
이제야 솟구치네.
“아 이제야 집으로 가요.
들을 지나 풀피리 불며
나 어릴 때 뛰놀던 그곳
부모형제 그리워지네.
지는 해 찾아 잠이 들면서
떠나온 지도 어느 덧 몇 해
강을 건너 산을 넘고
새들 따라 노래하였지.“
숨 한 번 크게 들이켜니
달빛 절로 흘러오고
때늦은 바람결에도
설레는 마음 어쩔 수 없네.
희로애락 이슬 적시며
저 푸른 벌판 쏘다니리.
♧ 섬, 또 하나의 그리움 9 – 김양호
맑은 네가 기꺼이 걸어오시면 나는 젊은 섬으로 다시 태어나
애기동백 만개한 그 섬에서 나는 시인이 되어 취하기로 했다.
일상에서 상처 받아 아프고 버림받은 날들은 수평선 멀리 밀어내고
또 다른 나를 끄집어 낼 일이다.
섬길 걷다보면 때로는 바라보는 일이거나 누군가 기다리는 일이거나
불청객 같은 내 발자취에서 나를 풀어주는 일들은
갯바람과 파도 소리로 이미 나는 섬과 내통될 일이다.
♧ 바다의 기록 – 박윤기
바다는
관절 마디마디,
쉰 듯 젖은 듯 금관악기 소리도 푸르고
거세게 후려치는 채찍,
어깨 들썩이는 울음도 푸르다.
모래톱에 거친 파도가 새겨 논 주름살도
섬 그늘에 온종일 머물다 간 외로움도 푸르고
바위섬 수천만 년 부서지는 뼈도
눈물 사르어 피어나는 소금꽃도 푸르다.
해일이 덮치고 폭풍에 휩쓸려도
수평선 너머 달려가는 말갈기도 푸르고
온 해협을 휘돌다 돌아와
포구에 넘실대는
만행萬行*의 아린 기록도 푸르다.
---
*만행 :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면서 닦는 수행
♧ 우문현답 – 박관용
달 밝은 밤
잠이 오지 않는 이유를
삼단논법으로 논하시오
너나 논하시오
♧ 기차는 떠나고 – 임인숙
이제는 말의 의미가 없다
마음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서로의 꽃받침이 삶의 뜻이지만
한때의 그늘
한때의 햇볕
지금은 잃어버린 우산이 된
껍질의 햇볕, 껍질이 그늘
유통기한조차 껍질이 되어버렸다
잘려버린 기억의 빛깔 사이
꼬리의 흔적조차 흐린
추상화 속 이야기가 가끔 말을 걸어온다
* 동인 시집 10호 『포엠만경』 (2021)에서
* 사진 : 가창오리의 군무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귤림문학' 2021 통권 제29호의 시(1) (0) | 2022.02.22 |
---|---|
권경업 시집 '자작 숲 움틀 무렵'의 봄 시편 (0) | 2022.02.21 |
월간 '우리詩' 2022년 2월호의 시(3) (0) | 2022.02.19 |
강덕환 시집 '섬에선 바람도 벗이다'의 시(5) (0) | 2022.02.18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의 시(3) (0) | 2022.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