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권경업 시집 '하늘로 흐르는 강'의 시

김창집 2022. 3. 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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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밭골 하늘 맑은 것은

고추잠자리들, 고 작은

그물 같은 날개 파닥여

해 질 무렵까지

제 몫의 세상 거른 때문이네

 

그러고도 기특한 것은

날개 접어 쉬는 곳이, 기껏

마른 고춧대 끝이나

흔들리는 쑥부쟁이 대궁 아니면

능금밭 탱자 울 가시 위 잠깐이야

 

안쓰러워 다른 곳 앉으라고 훅 쫓으면

이내 돌아와 하는 말

자기에게는, 오직

땅 위 발 디딜 곳이면 족하다는 거야

 

날아다니는 놈이, 무슨

넓은 곳 필요하냐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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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유화詩中有畵

 

내 시안에 걸려있는 이발소 그림

 

하루 세 번뿐인 막 버스가 자고 가는

팽나무집 큰 처자, 봄바람에

앞산처럼 불러오는 배 감당 못해

제 어미 패물 챙겨들고, 키폰러닝 키폰런

금성트랜지스터에 개다리춤, 도끼 빗 품고 다니던

조수녀석 찾아가던 날

봉알산 청솔갑 져 내리다가, 지난 가을

영림서 콩밥 먹고 나온 마름댁 둘째 녀석

게거품 허옇게 물고 씩씩거리더니

싸릿재 잿마루는 벌겋게 꽃물 들고

장터 하나뿐인 술청에

그 꽃물 든, 영산홍 같은 새 아가씨 왔다며

술도가 배불뚝이 주인, 포마드 짙게 바른 머리

연신 올백으로 빗어 넘기면

외할매 야메틀니 만들어준 돌팔이 치과의사는

족집게로 거울 속 귀밑 제 흰머릴 뽑으며, 짐짓

냉큼 한 입에 넣어도

비린내 전혀 안 나겠다던 난해한 이야기

졸음 겨운 가위소리에 실려, 사각사각

맨살 고샅 아득한 저편으로부터

흙먼지 길 뽀얗게 밀 창 너머 달려옵니다

 

내 시, 이발소 그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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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그림 : 과장된 표현으로 인해 구도나 내용에 있어서 모순성을 지니고 있는 싸구려 그림. 주로 풍경을 주제로 한 것들이며 이발소에 많이 걸려 있어서 통칭 이발소 그림이라고 말함.

 

 

 

!

 

돌아가면 내 혼 내키실

어머니 손에 들린 회초리, !

 

말 안 듣고 천방지축 싸돌아다니던 놈

걷어 올린 종아리에

 

붉은 느낌표 죽죽 그어지면

괴로워 하긴 당신이 하셨지요

 

아직도 철없는 이 종아릴 걷어

당신의 ! ! ! 표를 느끼고 싶어요

 

 

 

?

 

왜 이렇게 만드셨냐구요

그건 삶에 있어 모르면

물어서 들으라는 뜻 아닐까요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순 없지만

 

쫑긋 세운 내 귀는 물음표

그대를 향해 묻습니다. 오월 대숲 같은

내 안의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였나 보다

 

어찌, 제 속내를 다 드러내며 살까

앞앞이 못한 이야기 풍편에 떠도는

바람의 여울목 쑥밭재에 서면 눈물이 난다

 

신밭골 약초 캐던 외팔이 하씨*

늘 젖어 시린 가슴, 어쩌다 해거름에

남몰래 꺼내 말리다 보면

설운 마음에도 노을은 뜨거워 눈물은 났으리라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는 이

보이는 모든 것이 뜨거운 이

그리하여 뜨거워진 눈을 찬 눈물로 식혀야 한다면

전생에 그대도, 아마

차고 맑은 물에 눈을 식히던 열목어였나 보다

 

유정有情한 시인아! 생명주**처럼 풀린 강물

흔들리는 청솔가지에도 눈물이 나고

저무는 멧부리 걸린 조각구름에도 눈물이 난다

 

!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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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빨치산으로 총을 맞아 팔 하나를 잃고 포로로 잡혀 옥살이를 했다. 석방되어 목숨을 부지한 것이 전우들에게 죄밑이 된다며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하산하지 않고 귀먹은 부인과 함께 신밭골에서 살앗던 사람.

** 누에고치를 삶지 않고 그냥 풀어서 짠 명주.

 

 

 

등산

 

1

다들 정상에 서고 싶어 하지만

 

정상에는 대피소가 없습니다

 

2

오르기 힘든 것은

내려오기도 힘들다는 뜻입니다

 

3

생떼 쓰고 억지로 올라갔다가

힘들게 백담사 쪽으로 내려와서

연희동에서 고산병으로 고생하다 간 분도 있습니다

 

4

쫓기듯 정상에 다녀온 이들은, 더러

남의 엉덩이만 바라보았다는, 이상한

산행담만 들려줍니다

 

5

지리산 천왕봉과 설악의 대청봉이

중턱에 있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6

높은 산의 정상에는

사람들이 들끓기에 가기 싫습니다

 

지리산 천왕봉이 그런 산입니다

 

7

산정山頂을 바라보고 갔지만

산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산정 아래에 있다는 걸

하산 길에 보았습니다

 

8

오르는 것이 아니네

내려오는 것이네

굽이굽이, 두고 온 사연만큼

해거름 길어지는 산 그리메

막소주 몇 잔, 목젖 찌르르 삼키듯

그렇게 마시는 것이네

거기 묵김치 같은 인생 몇 쪽

우적우적 씹는 것이네

지나 보면 세상사 다 그립듯

돌아 보이는 능선길, 그게 즐거움이거든

 

 

                       * 권경업 시집, 어른을 위한 동시 하늘로 흐르는 강(작가마을, 2008)

                       * 사진 : 지리산의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