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잘했다 – 정두리
이 창가에서 보면
바람에 살랑살랑 하얀 등을 보이는
자작나무 그늘이 깊어졌다
자작나무는 천년의 나무라는
남의 말 듣고 심기를
잘했다
해가 뜨기 전부터
나뭇잎은
부지런히 먼지를 털어내고
내 방 창문 엎에
말갛게 서서 기다린다
창을 크게 내기를 잘했다
마주보게 자작나무 심기를
참, 잘했다
♧ 목련을 보면서 - 진길자
짓궂은 비바람 속 하얀 꽃길 열리더니
말없는 웃음으로 미소 짓고 서 있구나
빈집을
지어보는 하루
봄빛 한층 넉넉하다
이제 너 이울면 봄마저 가버릴라
연두와 초록 틈새 수많은 색깔 속에
그 어느
계절을 만나
웃으면서 살고 있나
♧ 그저 거기에 – 유영초
샛강은
그저 거기에 있다
바위와 부대끼는 여울목,
버들치가 춤추고 미꾸리와 노닐던 비릿한 기억을
모래톱에 미련 없이 파묻고
모두가 제 갈 길 가더라도
샛강은
그저 거기에 있다
누군들 바다 꿈꾸지 않으랴만
굽이굽이 실개천
산들산들 실버들에 낚이는
아이들의 예쁜 꿈만으로
샛강은
그저 거기에 있다
♧ 산자락 돌배꽃이 홀로 핀 봄밤 - 김내식
겨우내 혹독한 시련을 겪은
돌배나무가 살아남아
하얗게 꽃 피워 달밤에 웃는 뜻은
하늘에 대한 감사의 표시
수술이 밖으로 멀리 나와
바람에 손 모우며 기도한다
꽃이 하르르 떨어진다고
조금도 아쉬워 말라
꽃 진 자리 새잎 돋고
작은 열매 대롱이며 까르르 웃고
이렇듯 세상은 모두가
스스로 아름다운데
그대는 무엇이 불안하여
이 좋은 봄밤에 뒤척이는가
♧ 언젠가는 – 김학균
석양빛 아스라이 먼 강
추억이 샘솟는 정원에 앉아
기억의 강에 소비뇽 향을 뿌리면
흐르던 회상 서정의 빛 따라
그려낸 겹겹 숨겨진 고뇌들은
여울목 소용돌이처럼 방황하고
정에 지치고 꽃길도 멀리 있어
시달리면서 다시 일어나 걸어온 길
온 힘 끝까지 다한 긴 그림자
언젠가는 가슴으로 안아 들고
그 길이 내 길이고 내 존재였음을
사랑하는 그런 날 오지 않을까?
♧ 풀, 날다 - 이명
땅콩 밭을 뒤덮은 풀을 뽑는데 왜 그대가 생각나나
울타리 너머로 멀리멀리 던져 버리는데
너풀거리며 공중을 날아가는 풀
산중 깊숙이 들어앉은 몸이
씨 뿌리지 않았다고 항변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리움도 거추장스러워 남김없이 뽑아 던진다
풀은 밤마다 억세게 자라나는 어둠처럼
몸속에서도 무성한데
풀을 걷어내니 눈동자가 빛난다
샛노란 저, 눈빛
너, 그거 아니
풀이 어둠이라는 거
날려버리면 날아간다는 거
* 『산림문학』 2022년 봄호(통권45호)의 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강하 시집 '붉은 첼로'의 시(5) (0) | 2022.03.27 |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의 시(4) (0) | 2022.03.26 |
권경업 시집 '하늘로 흐르는 강'의 시 (0) | 2022.03.24 |
김순선 시집 '따뜻한 국물이 그리운 날'의 시(3) (0) | 2022.03.23 |
이애자 시집 '하늘도 모슬포에선 한눈을 팔더라'의 시(2) (0) | 2022.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