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덕환 시집 '그해 겨울은 춥기도 하였네'의 시(2)

김창집 2022. 4. 7. 00:17

 

봄풀의 노래

 

짓밟혀 억눌린 서러움쯤

힘줄 돋운 발버둥으로 일어서리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후미진 구석

모로 누워 새우잠 지새우는

목 타는 들녘의 얼룩진 밤에도

가녀린 목줄에 핏대 세우며

흔들림도 꼿꼿이 서서 하리라

없는 듯 낮게 낮게 엎디어

봄을 예감해온 눈빛끼리

밑동에서 길어 올린 자양분

은밀하게 서로 나누면

인동의 단맛 스미고 스며

마침내 열리는 눈부신 봄날

 

 

 

역사여

 

무릎 곧추세워 감싸 안고 기다리리라

너무 오래 한 곳에 머물렀다면

지독히 질긴 누군가를

정해 놓고 기다리리라

들끓던 마음들과 화해하다 보면

빈 가슴은 바람과 햇살이 채워주리라

미처 떠나보내지 못하는 날들마다

눈부신 기억 한줌 가득 박힌 뜻은

한 세월 아주 끝나지 않았음이니

이 침묵의 시간 흔들어 깨울 누군가가

바로 너였음 좋겠다, 역사여

 

 

 

천명을 알다

 

몇 번을 흔들려야 꼿꼿해질까

몇 밤을 뒤척여야 단단해질까

목 타는 비탈에 서 있어도

고단한 역사의 줄기 오히려 축으로 삼아

질기디 질긴 뿌리 내려왔거니

곧으면 곧은 대로 휘면 휜 대로

잔가지 굵은 가지 모성하게 뻗어왔거니

한 해에 꼭 하나씩 정직하게

한 땀 한 땀 나이테 그어 왔거니

반세기를 그렇게 보살핀 땅 속 밑거름들

낱낱이 열거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으리

이제, 비로소 천명天命의 귀 열렸으니

이 길로 내쳐 달려가면 들을 수 있으리

인정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의

푸근한 얘기, 아하! 이럴 땐

저 높은 꼭대기 가지마다에

새가 날고 바람이 쉬는, 햇살도 비도 머금는

둥지 여럿 걸어 놓고 싶다

평화를 향한 하얀 손수건 매달고

마구마구 펄럭이고 싶다

 

 

 

박진경 암살범 총살기

 

언 제; 1948923

어디서; 경기도 수색 동방 5리 지점 이름 없는 붉은 산기슭

소 속; 육군 제11연대 육군중위 문상길(23), 일등상사 손선호(22)

입 회; 미군장교 2, 관계인 장교, 기자

 

1948923일 오후 315분 두 사형수는 수색 국방군 제1여단 사령부 정문에서 미군트럭 한 대에 실려 벌거벗은 산과 산모퉁이를 돌아 준비된 사형 집행장에 도착

 

네모로 깎은 말뚝이 둘

붉은 산기슭에 나란히 서 있다.

허리끈 없는 장교복을 입고 문 중위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나서

천천히 걸어간다.

그 하나의 말뚝을 향하여

 

군기사령관인 사형집행 장교

총살형 집행장을 낭독한다.

마지막 유언의 기회를 준다.

 

스물세 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 세상으로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조선민족을 학살하는 조선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요.”

 

외치는 음성도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청정한 마지막 말에

화답하는 산울림이 영롱하다.

 

 

 

몸이 말뚝에 묶인다.

하얀 수건이 눈을 가린다.

왼편 가슴 심장 위에

검은 도그라미 사격 표식이 붙여졌다.

10미터의 거리를 두고

다섯 명의 사격수가 쏜 총탄 다섯 발은

기어코 문중위의 가슴을 뚫고 말았다.

 

하오 335

 

도 다른 하나의 말뚝을 향하여 손 상사

걸어간다, 미소를 띤 얼굴로

상관들에게 일일이 목례를 한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던 군가나 한마디 부르고 저 세상으로 가겠습니다.”

 

발을 멈춰 하늘 쪽으로 머릴 돌려

노랠 부른다. 용진가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의 깃발

넓고 넓은 사나이 마음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들어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천지를 진동하는 승리의 함성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용진용진

 

 

 

노래 끝나고

집행장 낭독되고

유언을 한다.

 

훌륭한 조선 군대가 되어 주십시요.”

 

겨누어 총, 사격명령

이때 손 상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 3천만 민족이여!”

 

이 말이 사라지기 전에

쏘앗!”

 

다섯 발 에므원 총알

가슴을 뚫었다.

 

하오 345

총성은 그쳤다.

 

 

                             *강덕환 시집 그해 겨울은 춥기도 하였네(풍경, 201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