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꽃잎 - 김영숙
의귀리 현의 합장묘 몸살 앓는 꽃 있대요
치레한 돌담 아래 젖가슴 탱탱한 꽃
만삭의 봄까치꽃이 유선乳腺 또 푸르러요
총 맞은 그 아주머니 해산달이었대요
아, 당겨진 배 위로 별이 졌을 거예요
두 아들 꼭 쥔 손이 기도로 뜨거웠겠지요
금어禁語의 시간 지나 자꾸만 돋는 혀
‘무사 죽였댄 헙디과 무사 죽였댄 헙디과’
출근길 나를 붙잡고 파랗게 떠는 꽃잎
♧ 무드내*의 봄 - 김연미
숨죽인 밥 냄새가 잿더미에 흘러요
타다 남은 희망을 삼켜도 될까요
이제 곧 넘을 수 있겠죠
창백한 무드내 겨울
총소리 사선마다 발자국이 쓰러져요
햇살의 살 끝에도 핏물이 번지네요
사는 건 어느 쪽인가요
뿌리가 흔들려요
흑백의 시간에도 공포는 붉어요
벙그물 궤**를 지나 겨우 돌아온 봄
홑겹의 붉은 꽃들을
피워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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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강동의 옛 이름.
** 4.3 당시 군경이 쏜 총에 다리를 맞은 부순녀 씨가 두 달여 혼자 버려졌던 동굴.
♧ 고구마 - 김영란
한 입 베어 물면 가슴께로 오는 통증 내 나이 다섯 살 아버지가 건네신, 마지막 인사하듯이 손에 꼭 쥐어주신,
후다닥 나가시는 길 뒤따르던 총소리, 영문 모른 어머니 내 손 잡고 뛰었지 솔밭 기어 산등성이 올라 토끼처럼 숨었지 별들의 보호 받으며 밤이면 마을로 내려왔어 도둑처럼 제집 털어 해 뜨기 전 산으로 갔어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 산이 집이었지 나를 지킨 집이었지 그게 오름이란 걸 커서야 알았어
산사람이 폭도라면 우리도 폭도였지 폭도가 빨갱이라면 우리도 빨갱이지 어느 날 군인에게 잡혀 학교에 갇혔어 예쁘기로 소문난 고모 어디론가 끌려갔지 돌아오지 않았어 물을 수 없었지
풀려나 집으로 와도 집은 집이 아니었지 아버지 찾아 고모 찾아 집에 가듯 산으로 갔어 토벌대다! 하는 찰나 어머니가 꼬꾸라졌어 십년 넘게 옆구리에 총알 박고 살아야 했지 명 긴 게 벌이라던 어머니, 팔순 넘게 사셨어
아버지 대신 편지가 왔지 마포형무소 소인을 달고
그것으로 끝이야 어디에도 아버지는 없었어 정뜨르 비행장에서 처형 소문이 돌았지 제 손으로 구덩이 파래서 총 쏘아 죽였다지 작은아버지는 거기서 죽었어
기막히고 기막히고 억울하고 억울해 다섯 살 그 가을을 잊어본 적이 없어
아직도 가슴에 걸려 내려가지 않아
♧ 어머니의 끝숨 – 김정숙
시국에 방구동으로 시집을 갔더랬지
하나뿐인 오빠는 산으로 들어가고
신랑은 죽창을 들며 산사람 잡는다 하고
뜬눈으로 지새다 친정으로 돌아왔어
부모님 일찍 여읜 서오누이 살았었거든
오빠를 잃어버리고 우린 죄인이었지
육지 형무소서 편지가 한 번 왔었어
‘걱정 말앙 기다렴시라’ 그걸로 끝이었지
밝을 날 아직 멀었니
오라버니
오 라 버……
♧ 사월의 시 – 손세실리아
해마다 사월의 시를 쓴다
눈동냥 귀동냥으로 쓴다
나 말고도 처처에서
책무처럼 연대처럼 쓴다
4.3평화공원 문주에도 걸리고
책으로 묶이기도 하는데
바다 저쪽의 시가 추모시라면
이쪽의 시는 생애시生涯詩라는 걸
입도 십 년째인
근자에 들어서야 깨달았다
일 년 중 단 며칠 사월을 기리며 쓴 시와
생의 매 순간을 사월로 살아내며 지은 시를
여태 동일 범주로 간주하다니
시어 하나 문장 한 줄
제사상에 올릴 메 짓듯
신명께 고하는 축문을 짓듯
영가옷 짓듯 하는데 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월의 시를 썼다
섬에 산다고 다 섬사람은 아니어서
제주에서 사월을 짓는 일이란
한목숨 걸어야 되는 일이라서
♧ 곤을동 해바라기 - 김진숙
겨울 지나 봄의 허기에 꽃씨를 뿌렸지요
막걸리 빵처럼 부풀어 오른 제주초가 흐릿해진 옛 지붕 위에도 꽃씨를 뿌렸지요 코흘리개 아이들이 두런두런 자랄 수 있게 작대기 하나 들고 통시에 앉은 엉덩짝에도 톳이며 미역이며 바다를 삶아내던 솥단지 까맣게 타버린 4 · 3의 몸서리에도 해바라기 꽃씨를 뿌렸지요 물허벅 지고 오는 아낙과 젖 물린 채 종종 걸음으로 저녁상을 차려내던 정지에도 오종종 둘러앉은 낭푼밥 숟가락 달그락 달그락대는 잃어버린 마을이라 아물지 않는 상처는 덧나기 일쑤라지만 더 이상 덧나지 않게 꽃씨를 뿌렸지요 무너진 제주 돌담 쌓고 또 쌓으며 드디어 꽃씨가 자라 커다란 눈으로 자라,
수없이 깨어난 눈들 팔월 근처였지요
*제주 4․3 73주년 추념시집 『거기, 꽃 피었습니까』(한그루,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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