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생각으로는 4․3의 ‘죽이는 방법’을 중심으로 하나의 시집을 엮으려고 했다.
쓰다 보니 욕심이 지나쳐 여기에 ‘죽이는 이유’가 들어가고 결국 두 권으로 나눠서 발간하게 되었다. (중략)
어쨌든 4․3은 내 인생의 화두일 수밖에 없다.
평생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도서출판 각의 대표인 박가가 선뜻 이 시집을 맡겠다고 할 때 써온 보람을 느꼈다.
‘날 것’으로 세상에 던져진 이 시집에는 많은 사람들의 고마운 땀이 담겨 있다.
-작가의 ‘후기’에서

♧ 돈질
그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다시 보면
어머니가 몸에 지니고 있던 돈다발을 그들에게 던졌고
민보단장이 나를 옆으로 밀쳐 백경사의 눈에 들게 했고
강순경이 줄에서 빼내어 밭도랑 쪽으로 걷어찼고
이순경이 발사한 순간 그 줄의 사람들이 다 죽어갔다
그들은 돈을 갈라 가졌고
어머니와 나는 목숨을 나눠가졌다

♧ 동업
독일 101부대의 한 병사가 아침식사를 하는 부대장을 찾아가 말했다
“저는 아직 아무 것도 안 먹었습니다”
“왜?”
“아직 유태인을 한 명도 못 죽였기 때문입니다”
삼양지서 정주임이 말했다
“난 하루에 제주놈 하나 이상 안 죽이면 밥맛이 없는 사람이야!”

♧ 삽 구워
장작불 피워서
삽들을 얹어놓고
역시 말고기는 검은기름이 최고야
거나하게 술 곁들여
말씹내 나도록 배부른 다음
산폭도 끌어내
벌건 삽날로
등땡이 후려치고
땅 파듯 내리찍어도
아직 안 죽었니?
그럼
곡괭이 구워!

♧ 이 모가지 임자 손들어
너희들
도피자 가족들은 모두
교실로 모여
엎드려
지근지근 밟아 죽이기 전에
말해
빨갱이 새끼들 어디 있어
몰라?
그럼 내가 보여주지
이 책상 위에 모가지들이 보이지
똑똑히들 봐
자 이 모가지 임자 누구야
그날 책상 위에 추가된 금방 잘려 철철
피 흐르는 싱싱한
모가지 하나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아이고 나 아덜이우다
어디 있다 잡현 영 험허게 죽어시냐
이 놈덜아
어느 세상에 영헐 수가 있나
이 백정놈덜아

♧ 내 말 안 들려
이 새끼야
내 말 안 들려
내말이 좆같다 이거지
말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이런 쌍놈의 새끼
내 말이 말 같지 않다 이거지
귀에 바람구멍 내줄까
이제 내말 들려
귓구멍이 뻥 뚫렸잖아
씨발놈의 새끼
끝까지 안 듣네
양쪽 귀에 총알이 관통되어 죽은
삼촌은
귀머거리였다

♧ 한라산 전사의 마지막 노래
이대로 끝나지 않으리라
순결한 조국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죽창 쥔 내 손에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분노로 일렁이는 그날의 함성
숯불처럼
투쟁의 불씨를 일구리라
거대한 해일로
다시 솟구칠 그날을 위해
이 한 목숨 이슬같이 바치리라
내가 죽어 나라가 산다면
*김경훈 시집 『고운 아이 다 죽고』 (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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