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2년 4월호의 시(3)

김창집 2022. 4. 14. 00:08

 

격자무늬 밤 이주리

 

 

고립에 갇혔다

기억은 늘 저 편의 과거

격자무늬,

흑을 사이에 둔 백이란

언제나 함정

강을 사이에 두고

그녀는 명암의 강을 건너지 못햇다

그녀의 세계는 늘 도화꽃 피는 채색된 과거

폐허가 된 정원을

꽃이 만발한 정원이라 느끼는 그녀는

지금도 스무 살

오십이 넘은 아이를 강보에 싸고

맨발로 걷는 그녀의 기억에 뭇별이 뜬다

슬픔과 절망은 가족들의 것

체념과 희망 사이의 격자무늬를 그려가는 밤

이천만 원, 중증치매 진단금

아무도 찾지 않은 요양원의 밤은

온 생을 지불하고 이천만 원으로 남았다

 

 

 

왕거미 - 강지혜

 

 

발안 사거리 복권방

천장에 인조 왕거미 한 마리 매달려 있다

공중에서 가부좌로 묵언 수행중이다

맑은 풍경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릴 때마다

왕거미는 곁눈질로 발걸음을 바삐 옮긴다

왼 쪽 오른 쪽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실낱에 의지한 몸이 허공에서 흔들거린다

 

저 허공에 매달린 구름 같은 삶

하늘은 항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개 바다

막막한 또 하루가 떠밀려 간다

간절하게 움켜쥔 삶이 끊어질듯 위태위태하다

문 틈새 찬바람이 들이닥쳐

거미줄마저 매몰차게 걷어가 버리고

드문드문 얼굴 꺼먼 외국인 노동자들

한 번씩 왕거미의 몸짓에 초점을 맞추고는

그리운 안개 바다를 가슴에 담는다

 

눈치로 알아채는 그들의 말

북북 끓는 밥솥에서 나는 달큰한 냄새가 배나온다

먼지로 쳐진 거미줄에 아슬아슬 얹혀진 사람들

파키스탄 아저씨도 방글라데시 아저씨도

한 줄 나란한 무지개빛 꿈

망망한 안개 바다에 출사표를 던진다

 

귀퉁이 자판기 백 원짜리 커피를 뽑아 들고

힘겨운 시간들을 따듯한 입김으로 날린다

사뿐히 복권방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한 가닥 희망을 안고 허공 속을 걸어가고 있다

발 꺼풀에 날 선 바람이 또아리를 튼다

 

 

 

종소리 - 강동수

 

 

아파야 멀리 간다는 종소리를

가까이에서 듣는 저녁

산은 그림자를 지우고

몸을 숨겼다

팽팽한 활시위를 당기듯

그네를 타는 박달나무 당목

한번 떠나간 소리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뒤를 쫓아가는 소리는 연어 떼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멀리 길 떠나는 소리에는

부드러운 눈길이 있어

잠들지 못한 꽃들에게

두 손 모아 포근히 잠들게 하고

풀벌레 제집으로 돌아가

몸을 뉘우게 하는 가느다란 울림

물고기들 잠시 지느러미 접고

바위틈에서 쉼을 얻는다

종소리 울리는 산에도

어둠이 길을 지우며 앞서간다

 

 

 

 

필리아꽃*, 마르다 - 나영애

 

 

우리는 노을 속에 핀 필리아꽃이었지

긴긴 시간 시들지 않고

알큰달큼한 필리아 향 즐겼지

 

너뿐이라는 고백이 황홀해서

가시가 있었다는 걸 보지 못했네

등 뒤에서 콕콕 찔러대었던 가시

이면을 못 보고 홀렸다는 것 알았지만

너무 늦었네

! 소리도 지르지 못하네

 

시들기 시작한 필리아꽃

뜨거운 바람 훅훅 나오는 가슴에 말려 걸어놓고

찔러보지도 못하는 가시눈으로 쳐다만 보네

 

---

*그리스어, 우정

 

 

 

소나무 - 위인환

 

 

바람이 지나는 들녘 어귀 소나무

세파를 삼킨 서러움, 구 척이다

기죽지 말자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억척같이 마련한 논 서너 마지기가

일필휘지 보증 서명에 날아갔다

재선충 같은 독촉장이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들고 황사같이 매운 이름

아버지는 향수鄕愁가 아니었다

원망을 소나무 껍질에 새긴 내가

아버지를 닮은 건가?

소나무에 등을 대고 하늘을 보는데

뜨뜨하게 전해지는 아버지 체온.

 

 

 

 

초리가 흔들리다 멈출 동안 - 강우현

 

 

양파가 껍질에 쌓여 은결이 들었을 때도

내게는 아무 일이 나니었다

 

무엇엔가 깊이 부딪쳐 생겼을 통증이 번지고 파고들며

목소리를 냈다

그것은 비바람을 걸어온 봄의 발자국

 

고개를 숙이고 내민 침묵이 내 것이 아닌 듯

담담히 칼로 오려낸

 

신이 껍질 속에 들어앉아 완벽하지 못한 작품을

죽음 너머로 가져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란다 화분에서 동백이 피고

양파의 겨울은 띄엄띄엄 바닥에 웃는 동백을 펼쳐 놓았다

떨어진 채로 완전한 붉은빛이 당신이 빈손으로 돌아간 세상 같아

맞는지 물었다

 

물음 속에서 내리는 눈이

12월을 덮고 앰뷸런스가 달리는 길을 지웠다

새 한 마리 날린 초리가 흔들리다 멈출 동안

어디선가 아이들이 늙으며 태어나고 있었다

 

베란다에 고만고만한 양파들이

싹이 나는지 가늠되지 않는 냄새를 풍겼다

그 정도는 내게 아무 일이 아니었다

 

 

                                        *월간 우리20224월호(406)에서

                                        *사진 : 제주 전농로의 밤 벚꽃(조명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