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석교 시집 '봄날 아침부터 가을 오후까지'(3)

김창집 2022. 4. 20. 08:46

 

불면 시

 

별짓 다해도 잠 못 드는 시간

차라리 밤길 거니는 것은

먹자마자 잠들어 버리는 것보다

백 배는 더 행복하다

 

사람들이 하나씩 나타나며 말을 붙인다

안녕하신가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그들 위해 기도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생각하는 것만도 인사 받을 일이었나

 

이슬에 젖어 돌아오는 길

달빛 아래 깃 푸는 새들

물메 대숲길 뿌리째 사라지고

잠든 저수지엔 영혼의 두런거림만

 

땀에 젖는 새벽녘이면

걱정하는 집사람

넋 들이러 가자고 채근하지만

 

 

 

이를 닦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빨에 때가 낀다

남의 몸을 먹은 죄

그 식적食跡이 남아

나의 무기를 삭게 한다

그러니까 이 닦기는

남의 살을 열심히 뜯기 위해

나의 무기를 벼리는 일

 

내 혀와 이를 거쳐

입 밖으로 빠져나간 말들이

너의 귀에 들어가면

음악이 아니라

때가 되어 있진 않을까

깊이 들어간 헛소리를 파내기 위해

그래서 넌 귓구멍을 후비는 건 아닐까

 

황사바람 부는 날이면

허공을 뒤덮는 먼지보다

가슴의 사막에 묻어둔

녹슨 기억의 때가

푸실푸실 일어날까

나는 그게 더 불안한 것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

 

  프랑스 말을 잘 배우지 않아서 발음은 잘 모르겠지만 개와 늑대의 시간혹은 신들의 영혼’, 이런 말이 있다 하데요 트와일라잇twilight과 비슷한 의미의우리말로는 여명, 박명, 어스름, 땅거미, 저물녘, 새벽녘, 이런 정도라던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지요

 

  막 해가 떠오르기 전 기온이 제일 낮은 시간, 막 해가 넘어가서 보랏빛 잔영이 서쪽 하늘 가득 드리운 시간, 어둠이 몰려올 것인지 밝은 해가 떠오를 것인지, 이미 결정은 됐겠지만 다툼이 끝나고 막 하늘이 바뀌는 순간, 그 순간.

 

  그 순간에는 가끔 내 운명이 보이기도 하데요 그런데 나는 내 운명이 썩 시원치 않아 뵈도 그걸 바꾸기로 맘먹어 보진 못했어요 뒤돌아서면 바꿀 수 없다는 게 훤히 보이니까요 그래서 그냥 그대로를 좋아하기로 합니다 어둠과 밝음의 사이, 천국과 지옥의 중간, 선과 악의 갈림길, 시와 비시의 경계, 너와 나의 미세한 틈새, 개와 늑대의 시간

 

 

 

만리장성

 

팔달령 만리장성 꼭대기

발 디딜 틈 없는 사람 사이에서

늙은 사내가 울고 있다

 

저 산맥 너머에

누가 있을까

오늘은 날던 새도 안 보인다

 

한 계단 한 계단

목숨으로 빚어진 성루를 밟고

아내 잃은 사내는

독한 이과두주를 병나발 분다

 

서러운 병사의 아내가 남긴

장성의 전설에

목 놓는 서러운 늙은이여

홀로 빛나는 은빛 머리칼에

천천히 내려앉는 죽음이여

 

 

 

여로旅路

 

수면에 봄 안개 피어오르기 전

연기처럼 철새들이 날아간다

바라보면 볼수록 새들은

비행운飛行雲보다 더 엷게 흩어진다

 

붉동백 힘없이 목 부러지는 밤

파도는 잠들지 못하고 하얗게 느껴 운다

 

새봄이 가까워지면서

산자락 아래로 낮게 떠 흐르는

철새들의 소리 없는 변주곡

드라이아이스처럼 밑으로만 깔리는 안개

그들의 지친 여행이 끝나고 있다

 

나도 어딘가에 내려앉아

푸근히 깃털을 고르고 싶다

 

 

 

해녀의 죽음

 

우도牛島의 칠십대 해녀 할머니

어제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조간신문에 짤막히 한 줄

 

신문지가 갑자기 망망대해 같다

 

열 살 무렵 물에 들어

일생을 숨비질하던 바다

할머니, 자로 허리접은 채

바다를 껴안고 놓지 않는다

 

산다는 게 하루하루 저승이었으리

물에서 나고 물에서 숨 놓으니

거친 바다도 이제는 극락이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안해진 할머니

수경水鏡 낀 얼굴에는

물거품 같은 미소도 떠올랐으리

 

 

 

            *김석교 시집 봄날 아침부터 가을 오후까지(심지, 200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