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면 시詩
별짓 다해도 잠 못 드는 시간
차라리 밤길 거니는 것은
먹자마자 잠들어 버리는 것보다
백 배는 더 행복하다
사람들이 하나씩 나타나며 말을 붙인다
안녕하신가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그들 위해 기도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생각하는 것만도 인사 받을 일이었나
이슬에 젖어 돌아오는 길
달빛 아래 깃 푸는 새들
물메 대숲길 뿌리째 사라지고
잠든 저수지엔 영혼의 두런거림만
땀에 젖는 새벽녘이면
걱정하는 집사람
넋 들이러 가자고 채근하지만
♧ 이를 닦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빨에 때가 낀다
남의 몸을 먹은 죄
그 식적食跡이 남아
나의 무기를 삭게 한다
그러니까 이 닦기는
남의 살을 열심히 뜯기 위해
나의 무기를 벼리는 일
내 혀와 이를 거쳐
입 밖으로 빠져나간 말들이
너의 귀에 들어가면
음악이 아니라
때가 되어 있진 않을까
깊이 들어간 헛소리를 파내기 위해
그래서 넌 귓구멍을 후비는 건 아닐까
황사바람 부는 날이면
허공을 뒤덮는 먼지보다
가슴의 사막에 묻어둔
녹슨 기억의 때가
푸실푸실 일어날까
나는 그게 더 불안한 것이다
♧ 개와 늑대의 시간
프랑스 말을 잘 배우지 않아서 발음은 잘 모르겠지만 ‘개와 늑대의 시간’ 혹은 ‘신들의 영혼’, 이런 말이 있다 하데요 트와일라잇twilight과 비슷한 의미의… 우리말로는 여명, 박명, 어스름, 땅거미, 저물녘, 새벽녘, 이런 정도라던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지요
막 해가 떠오르기 전 기온이 제일 낮은 시간, 막 해가 넘어가서 보랏빛 잔영이 서쪽 하늘 가득 드리운 시간, 어둠이 몰려올 것인지 밝은 해가 떠오를 것인지, 이미 결정은 됐겠지만 다툼이 끝나고 막 하늘이 바뀌는 순간, 그 순간.
그 순간에는 가끔 내 운명이 보이기도 하데요 그런데 나는 내 운명이 썩 시원치 않아 뵈도 그걸 바꾸기로 맘먹어 보진 못했어요 뒤돌아서면 바꿀 수 없다는 게 훤히 보이니까요 그래서 그냥 그대로를 좋아하기로 합니다 어둠과 밝음의 사이, 천국과 지옥의 중간, 선과 악의 갈림길, 시와 비시의 경계, 너와 나의 미세한 틈새, 개와 늑대의 시간
♧ 만리장성
팔달령 만리장성 꼭대기
발 디딜 틈 없는 사람 사이에서
늙은 사내가 울고 있다
저 산맥 너머에
누가 있을까
오늘은 날던 새도 안 보인다
한 계단 한 계단
목숨으로 빚어진 성루를 밟고
아내 잃은 사내는
독한 이과두주를 병나발 분다
서러운 병사의 아내가 남긴
장성의 전설에
목 놓는 서러운 늙은이여
홀로 빛나는 은빛 머리칼에
천천히 내려앉는 죽음이여
♧ 여로旅路
수면에 봄 안개 피어오르기 전
연기처럼 철새들이 날아간다
바라보면 볼수록 새들은
비행운飛行雲보다 더 엷게 흩어진다
붉동백 힘없이 목 부러지는 밤
파도는 잠들지 못하고 하얗게 느껴 운다
새봄이 가까워지면서
산자락 아래로 낮게 떠 흐르는
철새들의 소리 없는 변주곡
드라이아이스처럼 밑으로만 깔리는 안개
그들의 지친 여행이 끝나고 있다
나도 어딘가에 내려앉아
푸근히 깃털을 고르고 싶다
♧ 해녀의 죽음
우도牛島의 칠십대 해녀 할머니
어제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조간신문에 짤막히 한 줄
신문지가 갑자기 망망대해 같다
열 살 무렵 물에 들어
일생을 숨비질하던 바다
할머니, ㄱ자로 허리접은 채
바다를 껴안고 놓지 않는다
산다는 게 하루하루 저승이었으리
물에서 나고 물에서 숨 놓으니
거친 바다도 이제는 극락이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안해진 할머니
수경水鏡 낀 얼굴에는
물거품 같은 미소도 떠올랐으리
*김석교 시집 『봄날 아침부터 가을 오후까지』 (심지, 200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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