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박남준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2)

김창집 2022. 4. 21. 00:04

 

입맛이 쓰다

 

  종달새가 지지배야 기집애야 지지고 비비고

  아지랑이 몽글몽글 봄 처녀 가슴이 싱숭생숭

  산들산들 꽃 피는 봄날이면 그런다는데

 

  어서 오십시오 두부 사세요 순두부 사세요

  저 아랫마을에서부터 확성기를 틀고 오는 두부 장수 아저씨

 

  자 따끈따끈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두부가 왔습니다 순두부가 왔어요 참 맛있는 두부가 왔습니다 도토리묵 청국장 칼국수 콩나물 젓갈 오뎅 계란 김도 있습니다

 

  꽃이 피나 눈이 오나 두부 장수 아저씨의 레퍼토리는 변함이 없었다

  하루에 얼마나 벌어요

  아저씨의 얼굴이 순간 식은 두부처럼 딱딱해졌다

  팔리지 않은 두부와 물가기 시작한 콩나물과

  두부장수 아저씨네 밥상이 흑백사진처럼 찍혀서

  따끈따끈 팔려온 두부와 물가지 않는 콩나물의

  내 싱싱한 밥상에 아른거린다

 

  푸른 것들 깨어나는 봄날 입맛이 쓰다

 

 

 

산수국

 

제 작은 꽃이 보이지 않을까 봐

향기 없는 큰 꽃잎

허화虛花를 앞세워 벌 나비를 부르는 꽃

 

눈물겹다

어찌 너를 가짜라 부르겠냐

번쩍이는 것은 네온 간판이나

저잣거리 요란한 춤과 마이크를 든

아랫도리 뻑적지근한

아가씨들의 호객 소리 고운 네게 비기겠냐

 

구불구불 지리산 성삼재 넘는 길

산허리 잘라 길을 내고 철조망으로 가로막은

그 길가, 산수국 한 무리 낮은 포복

안간힘으로 기어 나왔는가

팔꿈치며 무릎, 헤진 넝마로 너덜거리는데

간절 간절 찾고 있다

애틋애틋 떨고 있다

 

 

 

장금도*의 춤

 

그녀는 다만 한 손을 슬쩍 들었다

놓았다.

하늘이 스르릉 치올라갔다가 푹

땅거죽이 주저앉았다

어디서 바람 한 점 스며들었나

그녀가 살랑 어깨를 우줄거리다 한 뼘

감아올린 외씨 버선코

지구 저 편 울음을 삼키던 새 한 마리

파르륵 날아올랐을 것이다.

멈칫거리다 앞으로 내밀고

노을의 저녁처럼 뒤돌아섰을 때

언제 거기 검푸른 산 하나 서 있었던가

내 몸은 물고기 같은 비늘이 돋아나

폭포를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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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살풀이 춤의 명인.

 

 

 

그때 검은등뻐꾸기가

 

쑥국을 끓여 먹던 봄날의 입맛이 푸른 날은

아주 옛날과 오래지 않은 오늘

그 중간 쑥국만 끓여 먹어 입안에서 쑥 냄새가

풀풀거리던 날이 있었다

돈을 쓰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객쩍은 호기로 산중 일기를 끄적이던 때였다

쑥을 캐던 어느 날 낯선 새소리

흐흐흐흐 흐흐흐흐

그러니까 나를 비웃는다 여겼다

손아귀의 힘이 풀리고

한 움큼 캐던 쑥이 후들거리며

땅에 떨어졌던 모양이데

거기 주저앉아 처량해졌던가 보데

누군가는 이렇게 들었다지

세상의 무거운 짐 다 벗어버리라고

홀딱 벗고 너도 벗고

홀딱 벗고 나도 벗고

한 스님께 물어보았지

빡빡 깎고 빡빡 깎고

연암이 열하를 건너며 그러했겠다

새 한 마리 우는 소리 마음에 따라 돌다니

지천명의 나이 쉰, 이네 내 귀에 어찌 들리려나

흐흐흐흐 검은등뻐꾸기

 

 

 

지리산에 가면 있다

   -둘레길

 

순한 애벌레처럼 가는 길이 있다

땀 흐르던 그 길의 저기쯤 마을이 보이는 어귀에는

오래 묵은 당산나무귀신들이 수천 천수

관음의 손을 흔들며 맞이해서

오싹 소름이 서늘한 길이 있다

 

두리번두리번 둘레둘레

한눈을 팔며 가야만 맛을 보여주는 길이 있다

더운 여름날 쫓기듯 잰걸음을 놓는 눈앞에는

대낮에도 백 년 여우가 홀딱홀딱 재주를 넘으며

간을 빼 먹는다는 소문이 무시무시한 길이 있다

 

서어나무 숲이, 팽나무 숲이, 소나무 숲이,

서걱서걱 시누대 숲이 새파랗게 날을 벼리고는

데끼 놈, 게 섰거랏 싹뚝,

세상의 시름을 단칼에 베어내고

도란도란 낮은 산길이 들려주는 이야기

작은 산골마을들이 풀어놓은 정겨운 사진첩

 

퐁퐁퐁 샘물에 목을 축이며 가는 길이 있다

막걸리 한두 잔의 인심이 낯선 걸음을 붙드는 길이 있다

높은 산을 돌아 개울을 따라 산과 들을 잇고

너와 나, 비로소 푸른 강물로 흐르고 흐르는

아직 눈매 선한 논과 밭, 사람의 마을을 건너는 길이 있다

 

 

         * 박남준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201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