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2022년 봄호의 시(2)

김창집 2022. 4. 22. 00:43

 

귤꽃 편지 김연

 

당신에게 닿을 마음

꽃의 그물망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당신은 어느 꽃그늘 아래

갇혀 있나

 

춥게 닫힌 비밀

쩍쩍 입 벌리며 피어나

광합성도 없이 자라난 마음

단 한 번 태양의 눈 맞춤에도

보답은 깊은 적막일 테니

고개를 들려거든

낮은 꽃그늘로 가야지

 

짐짓 다르지 않을 사정

안부는 또 절기를 놓쳤으나

재잘 재잘 바람 걸음 따라

아찔한 향기로 대신하고

찰나,

 

공간을 담기에

햇살 풍요로워

여기 저기 은신처 충분하니

잠시 은거,

 

분명 함께하는

이 봄,일 테니.

 

 

 

나를 부탁해 김순선

 

주차장에 쥐 한 마리

누워 있다

누가 아침 출근길에 실수했나?

설마,

그가 뛰어들었을까?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새벽부터

돌아다니다 봉변을 당했는지도

생을 마감하기엔 아직 어린 듯

눈을 감지 못한 채

누워 있다

 

어둠의 목격자는 사라져 버렸다

 

아부도 그의 죽음 애도하는 사람 없다

 

 

 

황새왓에서 - 김요아킴

 

성호를 긋고 올려다 본 하늘은

역사처럼 잿빛으로 침묵하고

까만 날갯짓이 그 미로를 재단하며

저 먼 한라까지 잡아당긴 오감도烏瞰圖

불안한 13인의 아해가 최후의 만찬으로

영원한 부활을 증거하며

열십자 복판에서 주기도문을 외는 사이

가난한 목자보다 더 헐벗은

섬사람들의 장두가 된

약관의 세월로 다져진 형형한 눈빛이

관아를 향해 진을 치던

그 죽창의 서늘한 기운으로

분노와 사랑의 모순을 단박에 찌르며

한 점 별이 된 신축년의 운명을

고스란히 기록한 이 순교의 땅, 그 옛날

황새가 많이 내려앉았다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서로에게 박해받은 모든 영혼을 위해

두 손 모아 나직이 읊조리며

다시 성호를 긋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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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새왓은 황사평의 옛 지명임.

 

 

 

마당 지킴이들 김정순

 

찬바람 불어

덧창 내리고 문 걸었지

아이 눈높이 밥풀 덕지덕지 붙여 놓은

깨진 작은 유리 조망 존

 

마당에 백구와

창문에 붙은 유리 조망과

작은아이 눈동자

훈련으로 익혀진 언저리

 

컹컹 백구의 휘슬,

아이를 부르는

유리조망,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

 

아무도,

 

초가지붕 눈썹 위에

달개집 흔드는

바람소리

콧물 옷소매로 닦으며

돌아서는 아이

 

 

 

오늘 점심 김항신

 

고구마튀김 세 조각

표고버섯 전 두 조각

노란 통닭 튀김 두 덩이와

수푸리모 한 잔,

그 사이 커피는 멍멍

 

흰머리 몇 올 검붉게 물들어가는

육십칠 절 입춘 맞이

 

 

 

처음 보는 노을 김승립

 

  오매 저것이 뭣이다냐

  징허게 이쁘구만이라

  내 평생 저렇게 곱고 장엄한 경치는 처음 본당게

  이 바다 나와 뻘밭에 몸 뒹군 세월이 얼만데

  이제사 저것을 본다니 참으로 어기찬 세월이네이

 

  전남 고흥군 남양면 배일엽(97) 할머니 열아홉에 시집 와 아들 딸 놓고 그저 그렇게 오순도순 살아가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는데 교편 잡던 지아비 여순사건 때 지식인이란 이유만으로 일제경찰 이은 군정경찰 고문 받아 피칠갑을 하고 목숨만 겨우 보전하여 돌아왔더라 피고름 토하다 지아비 결국 정신줄 놓고 폐인이 된 후 열 오누이 먹여 살리느라 한시 반시도 허리 한 번 펼 틈 없이 갯벌에서 일만 했더라 시난고난하던 지아비 먼저 앞세우고 자식들 모두 출가시켜 혼자 생을 건사하는데 막내딸 내려와 모처럼 소풍을 갔드랬다 딸이 구워주는 삼겹살에 약주도 한 잔 들이켜다 저승길 보일까 고개 들어 살며시 본 서녘하늘 붉은 노을 한 마장 길게 펼쳐 있는 게 아닌가

 

  어쩔까이 어쩔까이

  내 평생 처음 보는 경치랑께

  노을이 저리도 아름다운 줄 이제사 알았당게

 

  어허허 아리랑 한 곡조 뽑을랑께

  세월아 봄철아 오고 가지 말아라

  아까운 청춘이 다 가고 만다

  아리 아리랑 아리 아리랑

 

  할머니 눈물 어룽어룽한데 주름진 눈동자 속으로 붉고 고운 노을이 지고 있었다

 

 

                  * 계간 제주작가2022년 봄호(통권 7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