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얼굴 스치듯
책 속에 단풍잎 하나
유성처럼 떨어지네
낯선 얼굴 스치듯 바람 같은 약속이었나
책갈피,
눈물로 찍힌
붉음 마음 보았네
언제쯤
사랑이었나 먼 길 돌아 내 앞에 서서
갈피갈피 증거처럼 검측하게 핏줄이 서며
바스락
주름진 손이
가슴 한쪽 어루네
♧ 산복도로
배가 따뜻해야 마음이 넉넉하다지
누추한 햇볕조차 기를 펴는 수정동
비탈길 순환버스가 바다 함께 태우고
뱃심 좋아 칠십 년을
이고 지고 올랐다는
“뭐라카노 이 에미나이”
말도 반반 구순 할매*
저 길 끝,
고향 가는 길
반쯤만 갔다 돌아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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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수정동에 사는 친구모친으로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임.
♧ 저기, 추자도
급물살 오롯이 견뎌 징검돌로 나 앉아
들어주던 사연만큼 이별도 많았더라
제주와 전라도 사이 사투리도 뒤섞여
갓 잡은 생선 뛰듯 짐작 없이 가슴은 뛰어
풍랑예보 오고서야 차라리 편해지는
애초에 고립쯤이야 순명으로 받들며
떠난 이와 언약 따윈 애초에 없었지만
눈 뜨면 아득한 거리, 또 그만큼 멀어지는
내 안에 머무는 너처럼 눈감아야 보인다
♧ 개복숭아 꽃 피다
진짜도 아닌 것이
구실도 못할 것이
시고모 탄식에도
눈칫밥 달게 먹던,
꽃분홍 양산을 쓰고
만삭처럼 걸었었지
‘열 달, 딱 한번만 배불러 봤으면 좋겠네’
헛말인 듯
참말인 듯
기도처럼 되뇌던,
그믐밤
몰래 나갔던
그녀가 돌아왔다
♧ 물 위의 아이들
-톤레삽 호수*
신들도 이곳에선 어쩔 수 없나 보다
물빛조차 황톳빛,
부레옥잠 뜨듯이
말보다 먼저 배운 건
흔들림을 견디는 것
고무대야 배를 타고
“원 달라 원 달라”
애절한 그 눈빛은 끝 모를 물속 같아
삽시간 나도 흔들려
아무 말도 못했지
달라 대신 받아 쥔 색연필을 쳐들며
무지개를 그리듯 수면 위로 흩어지는,
석양에
화엄의 꽃이
물비늘에 부시다
---
* 캄보디아에 위치한 호수로 수상가옥이 많다.
*한희정 시집 『목련꽃 편지』 (한그루,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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