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랑쉬오름 - 오영호
비자림과
용눈이오름
높은오름 거느리고
사철
들꽃들을
오름 항아리에 담고 앉아
열한 분*
영을 위해
늘 헌화하고 있구나
---
* 열한 분 : 4․3 당시 다랑쉬 굴에서 민간인 11명이 희생됨.
♧ 열한 사람 – 안은주
끊이지 않는 연기
바닥까지 떨어진 검은 창자
우두둑 울음이 깊어졌을
깨져라 어둠을 때렸을
끝까지 몸부림쳤을
던져진 것들이 쏟아져 나왔을
하늘, 우리 집, 동네 어귀, 바다, 바람,
피붙이 얼굴, 피붙이 목소리,
모든 것들이 빠르게 뒤엉켰을
살갗을 뚫고 나온 사후(死後)의 뼈
끝내 끊이지 않는 연기
안간힘으로 오름을 올랐을 사람들
그들은 걸어서 내려오려고 했다
♧ 명도* - 오광석
말 못하는 어린 아이가
다랑쉬 마을 터에 앉아 있네
주춧돌처럼 생긴 바위에 앉아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네
아이의 집은 어딜까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대나무밭
사라진 초가들 사이
곧게 자란 대나무들만이
집터의 흔적을 남기고 있네
아이의 집은 어딜까
물어도 말 못하는
아이의 집은 어딜까
대나무밭 사이를 걸으며 묻는데
대나무들이 말을 하네
말 못하는 아이 대신
쉬쉬하며 말을 하네
감춰진 이야기들
대나무들이 쉬쉬하네
아이의 집을 찾지 못한 채
다랑쉬굴을 보고 돌아오는데
아이가 있던 자리엔
녹슨 칼자루만이 놓여 있네
---
*명도 : 아이가 죽어서 된 귀신
♧ 그해, 다랑쉬굴 – 조한일
43년 묻힌 채로 질식했던 이 섬의 동녘
허겁지겁 시멘트로 막아놓은 다랑쉬굴
그날이 드러난 뒤에 까마귀는 말을 잃고
지방도 못 사르고 증언했던 열한 영혼
동굴 속 오랜 선잠이 들춰낸 이 당의 어둠
오늘도 잃어버린 마을엔 대나무만 웅성댄다
♧ 다랑쉬동굴* 비가 - 허영선
도대체 천지의 새벽은 있었는가, 세상 문밖은
폭설 붉게 몰아치던 은월봉 돌오름 손지봉
부둥켜 끅끅 생울음 삼키던 분지로
슬픈 눈발이 흩어진다
무리져 얼크러진 한 생이 흩어진다
여린 유채꽃 대궁 하나만도 못했지, 목숨은
돌아갈 곳이란 숨겨둔 마음의 행처 하나 밖에 없어
동굴 속 한줄기 빛에 관한 관측은 어디에도 없어
난분분 분지마다 폭설은 쌓이고 쌓였지
한꺼번에 스러져 엎드린 마른 억새 황야의 이승과 저승
한치 앞 생도 예측할 수 없이 쓸려오고 쓸려가
곡기 주린 삶 앞으로 황급히 몰려왔다 몰려간
그 해, 연기의 역사
산자들의 꿈길을 재촉하지 않았겠나
버거운 연장의 삶은 부려 놓아라
뒹구는 녹슨 비녀 한 짝
어둠 속 죽어가는 풀꽃 잔뿌리는 매일 밤 죽어서도
뱉어낼 무엇이 있었을까
여린 울음마저 가둬버린 토굴 속의 잠
깊을 대로 깊어진 저 학살의 골짝마다
뼛골 사위어 가는 어둠의 나라
비로소 먼저 온 자, 문을 열었구나
아직도 들려오는 대처의 풍설은 흉흉하고 음험해
능란한 침묵은 더 능란한 자들의 세상
이제 웅숭거리는 소리마저 이슥토록
우거진 덤불가시에 찔려
어떻게 견뎌내지?
함께 썩음이 될 테까지,
우린 매일 밤 컴컴한 토굴 속 어둠의 나라
꿈길 헛길만 짚을 수밖에
---
*1992년 제주 중산간 다랑쉬굴에서 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11구의 유골이 발견됨.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77주년 광복절 아침에 (0) | 2022.08.15 |
---|---|
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의 시(6) (0) | 2022.08.14 |
오승철 시조집 '사람보다 서귀포가 더 그리울 때가 있다'(7) (0) | 2022.08.12 |
이애자 시집 '풀각시'의 시조(1)와 닭의장풀 (0) | 2022.08.11 |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와 흰 부용 (0) | 2022.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