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의 시(6)

김창집 2022. 8. 14. 19:01

 

젖다

   -용흥사에서

 

 

지상으로 뛰어내려 일부는 젖고 더러는 땅으로 스미고 또 더러는 고여 있고 급한 것들은 발 빠르게 무리지어 낮은 곳으로 향하는 흔적 없는 발자국을 본다

 

  저 발자국들이 왕조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느티나무의 서늘한 가슴을 적신다 미륵대불의 흰 옷자락을 한 올 한 올 다 적신다 보제루 처마를 흥건히 적신다 생각에 젖어 있는 숲을 한 번 더 적시고 난 후 난 후 작은 물길 따라 낮은 둔덕을 넘어 계곡으로 흘러간다

 

  말수 없는 지사 같은 배롱나무도 빗소리에 귀 기울이는 어여한 풍경도 범종의 푸른 종소리도 젖는, 고요를 때리는 빗소리 목탁새 소리 여운 같은 떡비 오시는 추석날 오후

 

 

 

빨간 장미

 

 

표정 없는 아침

사각으로 접은 시간을 의자에 앉힌다

장미 몇 송이 식탁 위에 꽂혀 있다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다

 

오늘은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축 늘어진 수국 이마가 후끈 달아올랐으면 좋겠어

날씨를 주문처럼 외우며

창밖을 바라보면

 

좁다란 골목길

긴 허리 휘어잡은

빨간 장미 한 무더기

늙은 콘크리트 담장을 올라타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표정으로 착함을 가장하던

뒤통수를 좋아한 새빨간 입술

내 돈 떼먹고 도망간 여자의 입술

 

어디서든 잘 살기를 기도한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나는 수국 잎처럼 넓어지지 않을 것이다

 

 

 

등대 2

 

 

나는 늘 여기 서 있을 것이오

 

당신이 있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는 것이오

 

당신 가시는 길 사목사목 바라보며

 

수평선 너머의 너머를 생각하오

 

 

 

행운동

 

 

달동네 봉천동 살 때

연탄 오십 장 들여놓으면 그저 오지고 마음 든든하던 때

동그라미 친 달력 월급 날짜를 몇 번이나 쳐다보는데

연탄 뚝 떨어지고

허옇게 단 몸뚱이 가루가 되도록 살아내는

아버지 같은, 연탄 한 장 새끼줄에 꿰어 들고 오르던

신혼 시절 봉천동 언덕길

 

가파른 길 언덕길 행운처럼 늙어갔고

지친 발걸음으로 살아낸

지금은 행운동이라 부르는 봉천동

 

 

 

산 그림자

 

 

여름 산이 저수지로 내려왔다

 

산은 가부좌를 튼 채 저를 잊은 듯 명상에 들었다

 

천진하게 놀고 있는 물 위 햇살들

 

흰 구름 몇 장 다 젖었다

 

 

            * 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문학의전당,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