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탁
당산봉 봄이 오면
엉알에 홀로 앉아
세 치 혀 길게 빼어
바닷물에 헹구고
샛말간 혀의 속살 위해
갯바위에 널어야지
안할 말 시샘의 말
불쑥불쑥 하던 입
어떤 날은 거친 욕
무심코 날리던 혀
당산봉 따스한 봄날
헹구고 말려야지
♧ 수선화, 괴다
그리운 이름 하나 땅속에 묻었다
건듯 부는 바람이 뭇별을 건너와서
담벼락 기대앉아서 그대 얼굴 그린다
꽃 필 날 기다리며 사랑 하나 심었다
세상에다 그리움 한가득 들어차면
그 사람 바튼 숨으로 달려나와 줄까요
해와 달이 번갈아 수없이 날 밀어내도
꽃봉인 듯 가만가만 기다려 있을게요
찬바람 휘몰아쳐도 장승처럼 버티며
괸다는 건 그 사람의 온기를 데우는 일
바람이 물고 있는 떨림도 다 읽으면
어쩌면 내 가슴 왼편에 괴어 있을 수선화
♧ 접신
부디 내게 와 주렴 사연 품고 오롯이
매일 밤 말의 사원 지웠다가 허물기
내 몸에 스밀 때까지 온밤을 반복하네
시님이 와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한 문장 두 줄 되고 두 줄이 석 줄 되고
어쩌다 내 집이 되면 눈물처럼 고웁네
♧ 홍시
가을 하늘 몇 자락 오가며 머물더니
어머니 둥근 마음 저리 익혀 놓았네
간밤에 어느 노래방 벌겋게 울다간 듯
막내딸 어린 응석 오냐오냐 하시며
긴긴 세월 자식 생각 뒤척이던 어머니
지상의 그리움들도 하늘을 향합니다
몇 닢이 남지 않은 이파리 거느렸네
바람이 사라지듯 구름이 지워지듯
하늘로 올라간 어머니, 눈물만 주렁주렁
♧ 나도 풍란
환상숲 거닐다가 얻어온 나도풍란
뿌리는 연약해도 수줍은 듯 고개 숙여
거실에 엎드려 뻗고 갖은 침묵 삼키네
이제야 되찾았나 그리운 은빛 향기
머들길 오래 걸어 어깨가 기울어진
그 속은 못 보더라도 틀림없는 내 가슴
바람이 솔솔 불며 피워내는 꽃이래요
내 안에 이는 바람 어떻게 알았는지
활활활 향기 날리며 피어난 나도 풍란
그대도 바람으로 내 생각 하신다면
그래요 나도풍란 맞아요 너도 풍란
한여름 삼복더위에 세상 덮는 이 향기
*김신자 시조집 『난바르』 (좋은땅,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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