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신자 시조집 '난바르'의 시조(6)

김창집 2022. 9. 25. 00:07

 

 

고욤나무 그 사이

 

 

오직 당신 그 언저리 서성이던 가을밤

고욤나무 그 사이 둥근 달 나오더니

초롱한 갈빛 눈망울 나를 향해 웃었네

 

노오란 그 달님이 샛노란 그 달님이

너처럼, 꼭 너처럼 나타났다 사라져

외로운 그림자 하나 서산마루 걸렸네

 

알알이 고욤 열매 너의 마음 같아서

한 세상 다녀가는 나의 미련 같아서

앙상한 고욤나무 틈 한세월이 서럽네

 

 

 

 

낭푼이 비빔밥

 

 

혀끝에 착착 붙는 먼 옛날 꿀맛인가

굽은 허기 수저질에 뒤섞인 밥과 나물

한겨울 달그락대던 내 유년이 따라오네

 

쓰일 대로 쓰이다 찌그러진 한 생에다

노랑 분홍 꽃잎들 보기 좋게 얹으니

예뻐서, 너무 예뻐서 한 입 먹기 아깝네

 

비빔이 트랜드로 낭푼이도 이젠 대세

못 먹고 힘든 시간 고백처럼 남겨 놓은

넉넉한 낭푼이의 말, 옛 것을 읽고 있네

 

 

 

 

 

 

깜깜한 하늘에다 누가 던진 공일까

터지고 찌그러지면 또 꿰메고 채우며

언제나 저리 두둥실 그대를 생각하네

 

서산에 다다르면 내 안에 떨어지네

둥근 달 띄워 놓은 내 가슴 우주에선

숨었던 그대가 나와 둥글둥글 굴리네

 

 

 

 

묵음

 

 

중학교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말했다

knot에서 k는 소리 없는 묵음이다

선생님 그 가르침은 한평생 내꺼였다

 

이 땅 위 오래 살며 기어이 널 만났다

나를 향한 앞 글자 묵음인 그 앞 글자

불러도 내 사랑에서 발음 안 들리네

 

 

 

 

나팔꽃

 

 

깎아지른 벼랑도 마다않고 올랐네

바람이 불 때마다 낭창낭창 흔들려도

널 향한 내 마음 빛깔 피워내야 하니까

 

하트 모양 이파리 줄줄이 따라와서

두근두근 쿵쿵쿵 고백을 다그치네

아뜩한 이 벼랑에서 널 향해 피라 하네

 

알았네 그러겠네 기왕에 올랐으니

한평생 이 기다림 연붉은 내 마음 빛

내 생에 단 한 번 순간 송이송이 열겠네

 

그리움 기나긴 밤 꽃봉오리 여미다

해오름 하늘에다 그대 부르며 피었네

불러도 텅 빈 허공에 지고 마는 그 이름

 

 

 

                               *김신자 시조집 난바르(좋은땅,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