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욤나무 그 사이
오직 당신 그 언저리 서성이던 가을밤
고욤나무 그 사이 둥근 달 나오더니
초롱한 갈빛 눈망울 나를 향해 웃었네
노오란 그 달님이 샛노란 그 달님이
너처럼, 꼭 너처럼 나타났다 사라져
외로운 그림자 하나 서산마루 걸렸네
알알이 고욤 열매 너의 마음 같아서
한 세상 다녀가는 나의 미련 같아서
앙상한 고욤나무 틈 한세월이 서럽네
♧ 낭푼이 비빔밥
혀끝에 착착 붙는 먼 옛날 꿀맛인가
굽은 허기 수저질에 뒤섞인 밥과 나물
한겨울 달그락대던 내 유년이 따라오네
쓰일 대로 쓰이다 찌그러진 한 생에다
노랑 분홍 꽃잎들 보기 좋게 얹으니
예뻐서, 너무 예뻐서 한 입 먹기 아깝네
비빔이 트랜드로 낭푼이도 이젠 대세
못 먹고 힘든 시간 고백처럼 남겨 놓은
넉넉한 낭푼이의 말, 옛 것을 읽고 있네
♧ 달
깜깜한 하늘에다 누가 던진 공일까
터지고 찌그러지면 또 꿰메고 채우며
언제나 저리 두둥실 그대를 생각하네
서산에 다다르면 내 안에 떨어지네
둥근 달 띄워 놓은 내 가슴 우주에선
숨었던 그대가 나와 둥글둥글 굴리네
♧ 묵음
중학교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말했다
knot에서 k는 소리 없는 묵음이다
선생님 그 가르침은 한평생 내꺼였다
이 땅 위 오래 살며 기어이 널 만났다
나를 향한 앞 글자 묵음인 그 앞 글자
불러도 ‘내 사랑’에서 ‘내’ 발음 안 들리네
♧ 나팔꽃
깎아지른 벼랑도 마다않고 올랐네
바람이 불 때마다 낭창낭창 흔들려도
널 향한 내 마음 빛깔 피워내야 하니까
하트 모양 이파리 줄줄이 따라와서
두근두근 쿵쿵쿵 고백을 다그치네
아뜩한 이 벼랑에서 널 향해 피라 하네
알았네 그러겠네 기왕에 올랐으니
한평생 이 기다림 연붉은 내 마음 빛
내 생에 단 한 번 순간 송이송이 열겠네
그리움 기나긴 밤 꽃봉오리 여미다
해오름 하늘에다 그대 부르며 피었네
불러도 텅 빈 허공에 지고 마는 그 이름
*김신자 시조집 『난바르』 (좋은땅,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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