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의 깊이
여름 뜰에서 안부 메시지를 받는다
초록이 무성하다고 답장 쓰려는데
손가락이 마음대로 초촉이라 치고 만다
초촉이 무성하다 했으니
시퍼렇게 돋는 풀을
시인인 그대는 초록 잉크 담뿍 든 펜촉으로 읽었으려나
날카로운 풀끝에 베인 손가락은
초촉焦觸의 칼보다
비명을 질러대는 방패에 가까운데
바지랑대 끝에 앉았다 가는 잠자리 한 마리,
박명의 펜촉이 건너오고 건너가는 서쪽이
핏물 흐르는 벽이다
공중을 방패삼은 이즈음의 나에겐
허공을 건너오는 모든 문장이 풀잎이어서
단검 같이 돋아나는 달빛을 공중에 적어둘 뿐
족집게로 올올이 뽑아낸 눈썹 같은 구절을
받아 적을 손톱이 없다
어두워가는 풀밭도 그리움을 주군으로 둔 나도
몸속에 잉크를 담지 않으면 쓸모없는 펜대
그대의 안부가 내려앉은 허공의 깊이를
모르는 바 아니나 번지는 노을마저
그대에게 닿는 펜촉이어서
저, 풀의 펜촉, 다다른 자리가 적벽이다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없는
초촉이 무성하니
허공을 베지 않으면 닿지 못하는
적벽의 서쪽, 거기가
지우고 다시 쓰는 이 여름의
마지막 지상이다
♧ 손에 닿다
비워 두었던 집을 찾아간다
무성하게 자란 시간이 나를 기다린다
그 시간을 좇는 일이 근황이라면
나의 근황은 몸 밖으로 난 잡초 뽑는 일
코 앞 잡초 외엔 어떤 세상도 보이지 않고
어떤 빛깔도 사라지는 것이어서
잡초 뽑는 일에만 집착하게 된다
손이 몸의 주체가 되는 그때
손은 생명을 관장하는 신(神)이어서
잡스런 희망과
죽을 듯 피어났던 절망이 뽑혀 나가고
열망에 지친 이마를 빛나게 한다
잡초인지 아닌지
분별 못 하는 눈이 밝아진 것은
흙투성이 손에 닿은 그때쯤
잡초인 줄 알고
풀꽃을 낚아챌 때도 있지만
생각만으로도 마당이 환해질 때가 있다
내 안 어딘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일까
구부리고 앉아 잡초를 뽑다 보면
손이 먼저 나를 솎아낸다
누더기 시간이 사라진다
♧ 왕소금 바다
눈발 날리는 제주바다를 본다
싸르락싸르락 구르는 눈발이 동치미를 담그는
왕소금 같다
흩어지는 그것들을 손바닥에 받아드니
어머니 모습이 어룽진다
하루 종일 바닷가를 헤매다 온 내 종아리에
물결무늬를 새겨 넣은 어머니,
시퍼렇게 얼어붙은 물결무늬는 동치미무
숭숭 썰어낸 칼금 같았지만
어머니는 칼금 속에 소금을 비벼 넣어
동치미를 담그셨다
종아리의 상처 자국 마른 뒤에야
국물을 붓던 어머니는 제 몸에 염장 지르는
제주바다 같았다
어머니 눈가에 소금 꽃 하얗게 돋아나는 밤,
나는 성에꽃 피워내는 유리창 바라보며
동치미 국물에 삶은 고구마를 목메게 먹었다
쩍쩍 갈리진 손등처럼 골 깊은
제주바다 앞에 설 때면
싸르락싸르락 왕소금 구르는 소리,
쓱쓱 내 종아리 익어가는 소리 들린다
* 강영은 PPE 『산수국 통신』 (황금알, 2022)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림문학' 2022년 가을호의 시(2) (0) | 2022.09.29 |
---|---|
김순이 시집 '제주야행'의 시(1) (0) | 2022.09.28 |
김신자 시조집 '난바르'의 시조(6) (1) | 2022.09.25 |
'산림문학' 2022년 가을호의 시 (0) | 2022.09.24 |
정군칠 유고시선집 '빈방'의 시(4) (1) | 2022.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