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영은 PPE '산수국 통신'의 시(7)

김창집 2022. 9. 27. 09:15

 

 

여름의 깊이

 

 

여름 뜰에서 안부 메시지를 받는다

초록이 무성하다고 답장 쓰려는데

손가락이 마음대로 초촉이라 치고 만다

초촉이 무성하다 했으니

시퍼렇게 돋는 풀을

시인인 그대는 초록 잉크 담뿍 든 펜촉으로 읽었으려나

날카로운 풀끝에 베인 손가락은

초촉焦觸의 칼보다

비명을 질러대는 방패에 가까운데

바지랑대 끝에 앉았다 가는 잠자리 한 마리,

박명의 펜촉이 건너오고 건너가는 서쪽이

핏물 흐르는 벽이다

공중을 방패삼은 이즈음의 나에겐

허공을 건너오는 모든 문장이 풀잎이어서

단검 같이 돋아나는 달빛을 공중에 적어둘 뿐

족집게로 올올이 뽑아낸 눈썹 같은 구절을

받아 적을 손톱이 없다

어두워가는 풀밭도 그리움을 주군으로 둔 나도

몸속에 잉크를 담지 않으면 쓸모없는 펜대

그대의 안부가 내려앉은 허공의 깊이를

모르는 바 아니나 번지는 노을마저

그대에게 닿는 펜촉이어서

, 풀의 펜촉, 다다른 자리가 적벽이다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없는

초촉이 무성하니

허공을 베지 않으면 닿지 못하는

적벽의 서쪽, 거기가

지우고 다시 쓰는 이 여름의

마지막 지상이다

 

 

 

 

손에 닿다

 

 

비워 두었던 집을 찾아간다

무성하게 자란 시간이 나를 기다린다

그 시간을 좇는 일이 근황이라면

나의 근황은 몸 밖으로 난 잡초 뽑는 일

코 앞 잡초 외엔 어떤 세상도 보이지 않고

어떤 빛깔도 사라지는 것이어서

잡초 뽑는 일에만 집착하게 된다

손이 몸의 주체가 되는 그때

손은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어서

잡스런 희망과

죽을 듯 피어났던 절망이 뽑혀 나가고

열망에 지친 이마를 빛나게 한다

잡초인지 아닌지

분별 못 하는 눈이 밝아진 것은

흙투성이 손에 닿은 그때쯤

잡초인 줄 알고

풀꽃을 낚아챌 때도 있지만

생각만으로도 마당이 환해질 때가 있다

내 안 어딘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일까

구부리고 앉아 잡초를 뽑다 보면

손이 먼저 나를 솎아낸다

누더기 시간이 사라진다

 

 

 

왕소금 바다

 

 

눈발 날리는 제주바다를 본다

싸르락싸르락 구르는 눈발이 동치미를 담그는

왕소금 같다

흩어지는 그것들을 손바닥에 받아드니

어머니 모습이 어룽진다

하루 종일 바닷가를 헤매다 온 내 종아리에

물결무늬를 새겨 넣은 어머니,

시퍼렇게 얼어붙은 물결무늬는 동치미무

숭숭 썰어낸 칼금 같았지만

어머니는 칼금 속에 소금을 비벼 넣어

동치미를 담그셨다

종아리의 상처 자국 마른 뒤에야

국물을 붓던 어머니는 제 몸에 염장 지르는

제주바다 같았다

어머니 눈가에 소금 꽃 하얗게 돋아나는 밤,

나는 성에꽃 피워내는 유리창 바라보며

동치미 국물에 삶은 고구마를 목메게 먹었다

쩍쩍 갈리진 손등처럼 골 깊은

제주바다 앞에 설 때면

싸르락싸르락 왕소금 구르는 소리,

쓱쓱 내 종아리 익어가는 소리 들린다

 

 

 

                                 * 강영은 PPE 산수국 통신(황금알,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