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순이 시선집 '제주야행'의 시(2)

김창집 2022. 10. 2. 01:58

 

 

제주야행濟州夜行

     –

 

 

바람은 오늘 밤 연둣빛 머리를 풀고 달린다

잡목 숲에서 이는 파도소리에 밀리며

나는 떠난다

한 마리 타박거리는 조랑말 등에 얹혀서

부정기선의 항로와 같은 발길

북극성의 초롱한 눈빛을 표지 삼는다

가야 할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산벚꽃 이파리 눈송이로 날린다

피아니시모로 날린다

물장올을 지났는가

수악교를 지났는가

등 구부리고 잠들어 있는 한라산 횡단도로

문득 저 아래 보이는 서귀포

오징어잡이배의 불빛은

밤바다에 가로등불로 졸고 있다

가늘고 아픈 길 따라

상수리나무 꽃향기에 목축이며

나는 떠난다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들을 향해서

 

 

 

제주야행濟州夜行

    -가을

 

 

나는 떠날 것이다

사라센인의 단검 같은

초승달을 벗 삼아서

한 마리 타박거리는 조랑말 등에 얹혀서

작은 바람에도 물결치는

바다를 품을 가슴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의 손을 잡고

 

나는 지날 것이다

어질게 잠들어있는

중산간 마을의 베개 맡을

전설의 열매가 소곤대는

아름드리 멀구슬나무 아래를

억새꽃 피어 뽀오얀 젖가슴 이룬

오름의 능선을

아이들 숨바꼭질하던 시골 초등학교

사철나무 울타리 곁을

밤이슬에 눈시울 적시는

들국화 핀 들판을

은빛 침 흘리는 초승달에

목축이며

이 밤에 나는 떠날 것이다

그 조용하고 단순한 풍경 속으로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 시간을 향하여

 

 

 

송당을 지나며

 

 

나를 애인처럼 사랑하던 아버지

이곳에 묻혀

스산한 날에는 한 줄기 바람으로 달린다

어질게 흘러내리는 둥근 선의

오름과 오름 사이

넘실대는 초원 굽이마다

목동이었던 어린 시절

이 들판에 놓아먹이던

그의 표한한 꿈 자취

아직도 푸르게 남아있다

생전의 그는

거칠고 호탕하다고 알려졌으나

실은 꿈 많고 외로운 사나이였다

그를 닮아 사랑도 많고

미움도 많은 나

이 들녘 지날 때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노니

송당松堂의 여신女神 백조여

무심치 말라

 

 

 

베릿내星川浦

 

 

옛이야기는 전한다

밤이 되면 내려와 반짝거리던

별무리 하도 고와서

이 바닷가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결같이 그리운 바다 쪽으로

문을 낸 낮은 초가집들

모두 떠나고 쓸쓸하다

 

고기 잡고 돌아오는 사랑하는 이

가슴 죄며 기다리던

가무잡잡하고 눈이 맑은 처녀

지금은 어디서 누구를 사랑하나

 

황근꽃 노랗게 피어나는

돌담에 기대어

해미 자욱한 바다를 보며

 

이곳에 내려오던 별무리

이곳에 살던 아름다운 사람들

나는 그저 그립다

 

 

 

대포해안에서

 

 

이곳에 가끔

신들은 찾아온다

 

지친 몸 기대는

그들만의 까만 의자가

저 벼랑 밑에서 바닷물 속까지

놓여있는 게 보인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져 가고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까지

쫓아다녀야만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가 가증스러워질 때

 

신들의 발길은 대포해안을 향한다

 

낮과 밤의 갈리는 시간

지는 해는 지구의 반대쪽에서

솟는 해가 되어 있는 시간

 

나는 무엇이냐

그리고 너는 무엇이냐

물어뜯으며 달려드는 바다를

성난 발길로 걷어차는

어리숙한 신들의 대포해안

 

찾아가 보라

그 소름끼치는 아름다움

 

 

                                  * 김순이 시선집 제주야행濟州夜行(황금알, 2019)에서